1.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미완성>
나의 영원한 애청곡인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을 중국에서 날아온 중금속 오염된 미세먼지로 가득한
초봄 낮에 다시 듣는다
(서해를 건너자마자 중국 해안을 따라 4백여 곳의 쓰레기 소각장이 있다는데 중국의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한국은 점점 더 독가스 속에서 살게 된다. 중국과 한국 구간은 바람이 서에서 동으로 부는 편서풍이기 때문
에 중국에서 오는 황사, 중금속 오염 공기, 쓰레기 소각 먼지 등을 피할 수가 없다.)
오늘은 클렘페러의 음반인데, 뵘, 쥴리니, 발터, 푸르트뱅글러 모두 훌륭하지만, 클렘페러의 이 연주 역시
참 좋다.
슈베르트의 낭만적이고 애수적인 정감, 숭고한 정서에 음악 듣는 맛이 절로 살아나는 듯하다.
25세에 작곡한 후 곡을 만든 이는 한 음도 들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버리고 사후 37년이나 지난
1865년에야 초연되었으니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사실 슈베르트는 자신이 작곡한 교향곡들 중 한 곡도 실제 연주로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쉴 사이 없이 악보를 써내려가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하며,
스스로를 ‘작곡하려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 곡이 두 개 악장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여러 얘기들이 있지만 “두 개 악장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담았기 때문에 천재의 직감으로 붓을 놓았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제3악장을 시작한 흔적이 있기 때문에 원래는 4악장까지 생각한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돌아가신 작곡자께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다.
1865년의 초연 연주회장에 참석한 당시의 유명 평론가 한슬릭은
“마치 그리운 슈베르트가 먼 여행에서 돌아와 우리들 사이에 살아서 함께 서있는 듯한 기쁨에 사로잡혔다!”
고 적었다.
어느 지휘자는 “슈베르트는 이 곡으로 이미 영원한 안식의 길을 채비해 놓고 있었다...”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까마득한 옛날의 어느 늦가을 저녁인가, 낙엽을 밟으며 집에 들어와
<미완성> 교향곡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거실 소파에 앉아 치즈 안주로 싸구려 양주를 두어 잔 마시다 문득 “아, 좋다...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의 무드가 바로 이런 거다...” 싶었던 순간이 어렴풋 기억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컥거리는 평생 친구 혹은 나의 분신과도 같은 이 명작에 대해 더 이상 무슨 상념이나 소회, 감상평, 추억을 나열한다는 것이 그저 거추장스러울 따름이라 더 쓸 말이 없다...
2.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 <그레이트>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들은 김에 슈베르트의 제9번 교향곡 <그레이트>도 모처럼 듣는다.
이 곡을 푸르트뱅글러, 뵘, 발터, 쥴리니, 요훔 등의 연주로 많이 들었지만 오늘은 음반 상태가 깨끗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언젠가 구입했던 솔티 지휘의 1981년 녹음으로 듣고 있다.
거대한 밀물처럼 풍성하고 장대한 음의 홍수가 끝없이 이어져 황홀해진다.
이 음반을 듣는 동안만큼은 주로 돈에서 비롯된 일상의 시름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어 좋다.
1980년대 후반, 2년 가까이 시카고 인근에 살았기 때문에 당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던 솔티에 대해 내 나름의 추억이 있다.
시카고에 나갈 때마다 미시간 호숫가의 인상파 콜렉션으로 유명한 <시카고 미술관>과 미술관 바로 건너
맞은편의 <시카고 심포니 홀>을 수시로 들락거렸는데 벌써 삼십년이 흐른 먼 옛날 일이 되고 말았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더니...
슈베르트의 제9번 교향곡은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9개월 전에 완성한 작품인데, 너무 길고 교향곡다운
짜임새가 엉성하다는 평도 있지만 뭔가 마음이 무겁거나 무슨 곡을 들을까 망설이게 될 때 제일 먼저 손이
가는 ‘내 마음의 노래’이다.
뉴욕 만하탄에서 근무하던 시절, 틈만 나면 들렀던 72가의 단골 음반가게 <그라이폰>에서 슈베르트의
이 교향곡이 보일 때마다 닥치는 대로 구입하여 현재 내 음악실에 이 곡 음반이 지휘자별로 꽤 된다.
가장 자주 들은 음반은 요훔이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1958년 도이치 그라모폰 음반이다.
이 곡에 대해 상당히 자신감이 있었던 슈베르트는 곡을 완성한 후 빈 음악협회에 연주를 의뢰했으나
협회로부터 곡이 너무 길고 난해하여 연주가 곤란하다는 답을 받고는 악보를 서랍에 처박아두었던 것 같다.
슈베르트가 사망하고 10년이 흐른 뒤 슈만이 슈베르트를 참배하러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디난트의 집을 들렀는데,
그곳에서 슈베르트의 유품을 구경하던 중 이 곡의 악보를 발견한 슈만은 슈베르트 형의 승낙을 얻어 악보를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있던 멘델스죤에게 보냈고,
드디어 이듬해인 1839년 3월 멘델스죤의 지휘로 이 곡의 역사적인 초연이 이루어진다.
초연 후 이 곡을 발굴한 슈만은 자신이 주관하던 잡지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이 교향곡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슈베르트를 참으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속에는 당당한 작곡 기술 외에 갖가지 다채로운 생명이 나타나 있고 도처에 깊은 의미가 있으며 하
나하나의 음이 날카로운 표현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슈베르트 특유의 로맨티시즘이 넘치고 있다.
그리고 천계(天界)처럼 유장(悠長)하다...”
어느 애호가에 따르면, 슈만이 여기에서 말하는 유장함이란 단순히 시간적인 길이가 길다는 뜻이 아니라
“한없이 이어지는 신성한 아름다움”을 의미한단다.
사족으로 한마디 덧붙이면, 이 곡이 교향곡다운 짜임새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길이가 너무 길기 때문에
자칫 연주가 부실하면 듣기가 고역이라는 말이 있고, 나 역시 그런 점을 느끼고 있다.
누군가는 “처리를 잘못하면 지루하고 역겨우나 연주만 우수하다면 베토벤에 견줄 수 있는 당당한 위용과
속세를 떠난 듯한 아름다움을 발휘할 수 있다”고 쓰기도 했다.
그래서 이 곡은 반드시 연주가 훌륭해야 한다.
대체적으로 뵘, 쥴리니, 푸르트뱅글러, 발터의 연주를 좋아하는 애호가들이 많다.
대한민국 최고의 클래식LP 콜렉터로 자타가 인정하는 서울의 K선생은
이 곡의 최고 연주로 쥴리니를 꼽았고, 베스트셀러 <이 한 장의 명반>의 저자 안동림 교수는
단연 푸르트뱅글러를 추천하며 천국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역사적 명연주라고 했다.
이 곡의 어느 부분이 특별히 좋고 나쁘고 지루하고를 떠나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무심히 듣다 보면
뭔가 위안이 되고 왠지 정이 가는 그런 작품이다.
이 나이에도 이렇게 슈베르트를 들을 수 있으니 완전히 실패한 인생은 아니라 생각한다.
슈베르트라는 휼륭한 안식처가 있어 정말 다행이다...
[옮긴글]
슈베르트 : 교향곡 제8번 <미완성>. 솔티의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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