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방황

春風秋霜

여풍2 2024. 6. 15. 08:59

 

●[춘풍추상ㅣ春風秋霜] 인격 수양에 힘쓰고 남에게 관용을 베푸는 자세. 春(봄 춘) 風(바람 풍) 秋(가을 추) 霜(서리 상).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의 줄인 말로,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과 같이 부드럽게 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인격 수양에 힘쓰고 남에게 관용을 베푸는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쓰인다. 자신을 엄격히 대하며 인격 수양에 힘쓰고 남에게 관용을 베푼다면, 여러 사람에게 존경을 받게 되고 미움을 사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뜻의 사자성어로는 자신에게는 박하게 남에게는 후하게 한다는 뜻의 ‘박기후인(薄己厚人)’, 남에게 자비로우면 적이 없다는 뜻의 ‘자비무적(慈悲無敵)’이 있다. 또한 남의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해주면 훗날 반드시 보답을 받게 된다는 뜻의 ‘절영지연(絶纓之宴)’, ‘절영지회(絶纓之會)’와도 상통한다.

춘풍추상의 출전은 중국 명나라 말기 때의 문인 홍자성(洪自誠)이 지은 채근담(菜根譚)이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과 같이 부드럽게 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는 뜻의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에서 유래한다.

한편, 이와 같은 관용의 자세는 동양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되어 여러 문헌들에 기록되었다. 《명심보감(明心寶鑑)》 「존심(存心)」 편에는 “남을 책망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책망하고,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라(以責人之心 責己 以恕己之心 恕人).”라는 표현이 있다. 또한 공자는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편에서 “자신을 엄하게 책망하고 남을 가볍게 책망하면 원망이 멀어질 것이다(躬自厚而薄責於人 則遠怨矣).”라면서 갈등을 해결하고 화합의 길로 나가기 위해서는 관용의 자세가 중요함을 강조했다. 
 

춘풍추상’(春風秋霜)은 중국 명나라 때 문인 홍자성이 지은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말이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 즉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하게 라’는 뜻인데 이를 줄여서 춘풍추상이라 한다. 사람관계에서 누구나 한결같이 좋게 지내는 사람을 ‘두루춘풍’ ‘사시춘풍’(四時春風) 같은 사람이라 부르기도 한다.

​명나라 말기에 부패한 권력, 바닥난 국고 등 혼란한 시대에 저자는 참다운 사람의 길을 모색하고, 이 책을 통해 인생의 참된 뜻과 지혜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정부 시절 청와대에 신영복이 쓴 춘풍추상이란 액자가 걸렸다. 공직자는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국민에겐 겸손한 자세로 봉직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춘풍추상을 외쳤던 정부가 그와 반대로 자신에겐 지극히 관대하면서 남에겐 서릿발 같은 고무줄 잣대를 적용하면서 ‘내로남불 정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로마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의 저울’을 연상하게 된다. 오른손에 칼을 왼손엔 저울을 들고 눈은 안대로 가리고 있는데, 이 안대를 가린 것은 법은 만인에 평등하고 공평하게 판단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청렴했노라’ 대답할 수 있는 공직자가 많을 때 비로소 공정한 사회라 말할 수 있다. ‘춘풍추상’을 적어놓고 ‘내로남불’이라 읽는 우매한 공직자가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옮긴글]

 

▶디케(Dike)의 저울

정의의 여신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의 마아트(Maat)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마아트는 정의뿐아니라 진리·질서를 상징하여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현재의 정의의 개념에 가장 가까운 여신은 그리스의 디케(Dike)이다. 그 후 로마 신화를 통해 정의의 디케에 형평성의 개념이 추가되면서 오늘날의 정의의 여신은 유스티치아(Justitia)가 탄생하였고, '정의(Justice)'란 단어가 여기서 생겨났다.

 

그리스의 법(Dike)과 정의(Dikation), 로마의 법(Jus)과 정의(Justice)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서구에서는 법과 정의의 연관성을 바탕으로 인격화시킨 정의의 여신상을 법의 상징물로 여겨 각 도시의 시청, 법원, 광장 등에 세웠다. 그리스의 여신 디케는 칼만 쥐고 있었으나 로마의 유스티치아에 이르러 공평의 의미가 가미되어 저울을 들고 있는 모습의 여신상이 만들어졌다. 저울은 법의 형평성을 표현하고 있고, 칼을 쥐고 있는 것은 법을 집행함에 있어 엄하게 하겠다는 표현이다. 많은 여신상은 얼굴에 눈을 가리는 띠를 두르고 있거나 눈을 감고 있는데, 이 모습은 저울질에 있어 주관성을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정의의 여신상은 각 나라의 시대와 사회의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형되어 묘사되고 있다. 우리 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가리지 않고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다. 디케의 저울 정의의 여인상 이라고 하면 천으로 눈을 가린 채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서 있는 여신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형상은 하나가 아니다. 눈가리개 없이 두 눈을 뜨고 있거나 서지 않고 앉아 있는 여신도 있고, 칼만 들고 있거나 반대로 저울만 들고 있는 여신도 있다.

정의의 여신 원조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디케다. 제우스는 율법의 여신 테미스와 사이에 세 여신을 낳았다. 그들이 각각 디케(정의의 여신), 에우노미아(질서의 여신), 에이레네(평화의 여신)이다. 디케가 로마 신화에서는 ‘유스티티아(Justitia)’로 바뀌었다. 유스티티아가 영어 ‘Justice(정의)’의 어원이된다. 초기 디케 상은 저울 없이 긴 칼만 들고 있었다. 디케는 정의를 훼손하는 무리에게 재앙을 내렸는데 긴 칼이 바로 그 응징의 상징이다. 그러다 유스티티아의 상에 이르면 칼과 함께 저울도 들게 된다. 그 이후에는 아예 칼 없이 저울만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도 한 손에는 저울을, 한 손에는 칼이 아닌 법전을 들고 있다. 칼에서 저울로 정의의 여신상 소품을 보면 정의의 핵심이 칼에서 저울로 이동해왔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가장 널리 통용되는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도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로서 칼보다 저울에 방점을 찍고 있다. 저울은 형평을 따지는 일을 상징한다. 여기서 말하는 형평이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법질서 사이에서, 구체적 타당성과 법적 안정성 사이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정의의 핵심이 응징에서 형평으로 이동한 지 오래됐음에도 여전히 정의를 저울이 아니라 칼로만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정의의 핵심을 칼이라고 보게 되면 ‘정의’의 개념을 ‘불의’의 반대말로만 이해하고, ‘불의’의 편에 선 사람을 칼로 베는 것만 중시하게 된다. 이 경우 저울질은 불필요해지고 결국 우리 편은 ‘정의’, 남의 편은 ‘불의’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저울 없는 칼질은 폭력일 뿐이다. 저울을 사용하더라도 기울어진 저울로 자의적·형식적으로 저울질하는 것은 정의를 사칭한 불의일 뿐이다. 저울에 올려놓기도 전에 칼부터 끄집어내 벨작정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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