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방황

통돼지 구이論 - 찰스 램

여풍2 2018. 2. 23. 08:27

세계 수필 문학 

 

           통돼지 구이 

                                           

                                                                         찰스 램 (영국의 문인)

 

 

 

선과 악은 서로 얽혀서 한 묶음으로 된 채 쉽게 풀리지 않으며,

풀면 어떤 위험이 뒤따른다는 인간의 복잡한 성격과 달리

돼지는 아주 훌륭하다.

 

내 친구인 M이 친절하게도 어떤 중국의 책자를 읽어가며 설명한 일이 있다.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인류는 오늘날의 아비시니아(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별칭)에서도 볼 수 있듯이 처음 7만년 동안에는 산짐승의 날고기를 물어뜯어 먹으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 시대의 일은 저 위대한 중국의 성현 공자의 우주변화에 관한 저서 <주역>의 제 2장에도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거기서 공자는 일종의 황금시대라는 것을 cho-fang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글자 그대로 요리인의 휴일이란 뜻이다.

그 책자는 또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전하고 있다. 즉 로스트roast하는 기술, 아니 브로일링broiling하는 기술 (로스팅은 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굽는 것이고, 브로일링은 석쇠로 굽는 것:역주)은 다음에 말하는 것과 같은 과정으로 우연히 실현된 것이라 한다.

 

돼지를 치는 호티라는 사람이 어느 때처럼 돼지에게 줄 도토리를 주우려고 어느 날 아침 숲속으로 가면서 오막살이는 큰 아들인 보보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아이가 대단한 말썽꾸러기여서 같은 나이의 어린애가 대개 그렇듯이 불장난을 좋아했다. 불장난 하는 끝에 불똥이 짚단에 튀었다. 그러자 그 불은 짚단에 당겨졌고, 초라한 집 전체를 불살라 완전한 잿더미로 만들었다. 오막살이 (처량한 노아의 홍수이전의 간이 건물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와 함께 그보다 더 중요한 것, 즉 새로 낳은 한 배의 훌륭한 새끼돼지 아홉 마리가 죽어버린 것이다.

중국 돼지는 우리가 책에서 읽은 대로 예로부터 동양 어디서나 사치품으로 소중하게 여겨졌다. 보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대경실색했다. 물론 집을 태워서가 아니다. 집이라야 마른 나무 몇 가지만 가지고 한두 시간만 수고하면 자기 아버지와 힘도 안들이고 다시 세울 수 있으므로, 돼지를 잃은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할까 궁리하던 보보는 머리를 쥐어짜며 궁리를 했다. 그러던 중 어떤 냄새가 콧구멍에 스며들었는데, 그가 여태껏 맡아보지 못한 냄새였다. 어디서 나는 냄새 일까? 오두막이 타면서 나는 냄새는 아니었다. 그 냄새는 이전에 맡아본 적이 없던 냄새였다.

 

사실 불운한 이 어린 방화자의 부주의로 생긴 이러한 일은 전에도 도처에서 벌어지곤 했던 사건이었다. 또 그 냄새는 누구도 알고 있는 식용작물, 잡초, 꽃의 향기 따위와는 전혀 비슷 한데가 없었다. 동시에 예고적인 군침마저 아랫입술로 흘렀다. 어떻게 생각해야 좋은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보보는 여전히 겁이 나서 돼지가 어떻게 됐는지 자세히 보려고 쭈그리고 앉아서 검게 탄 돼지를 만져보았다. 그러자 보보는 손가락을 데었다. 뜨겁고 아픈 손가락을 식힐 생각으로 보보는 멍청이처럼 손가락을 입에 대고 빨았다. 이때 불에 탄 돼지 껍데기의 부스러기가 조금 손가락에 묻어 났다. 그래서 자기 생애에 최초로 그 맛을 보았던 것이다. 노릇노릇 타서 알맞게 오돌오돌해진 돼지 껍데기의 그 맛을!

그는 다시 한 번 돼지를 만지고 뒤적여 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에 묻어나는 그 고소한 맛을 음미했다. 이제는 손가락이 뜨겁다는 사실을 느끼지도 못했다. 마침내 그의 둔한 머리에도 사건의 진상이 파악되었다. 냄새를 풍긴 것은 불에 익은 돼지였던 것이다. 또 그렇게 맛이 좋은 것도 돼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보보는 이 새로 발견한 고기 맛을 참지 못해서 잘 구워진 돼지고기를 크게 한 조각 뜯어내 짐승처럼 입안에 틀어넣었다.

 

그때였다. 어린 방화범을 벌하려고 몽둥이를 들고서 연기 자욱한 서까래 사이로 들어왔던 아버지는 그 광경을 보자 젊은 망나니의 어깨에 심한 우박을 내리듯이 몽둥이질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보보는 그 매를 파리의 장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혀와 입안, 위장 언저리에서 체험되고 있는 근질근질한 즐거움은 아무래도 신체의 먼 곳에서 느끼는 고통을 무시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럴수록 호티는 계속해서 때렸는데, 아무리 때려도 보보는 돼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얻어맞으면서도 보보는 억척스레 그것을 거의 다 먹어치우고 있었다. 돼지 한 마리가 동나자 보보는 자신의 입장을 다소 깨닫고 아버지의 질문에 응했다.

이 버릇없는 놈아, 대체 뭘 먹고 있는 거냐? 쓸데없는 짓을 해서 집을 세 채씩이나 태워먹고도 모자라 그따위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죽어라, 죽어! 그런데 대체 너는 뭘 먹고 있는 거냐? 불을 먹고 있는 거냐?”

, 아버지 돼지에요, 돼지. 얼마나 맛이 좋은지 몰라요. 이리 와서 잡숴 보세요.”

호티의 귀는 절망 때문에 징징 울리고 있었다. 그는 자식을 저주했고 또 불에 탄 돼지를 정신없이 먹는 자식을 낳은 자기 자신을 저주했다. 후각이 놀랄만큼 예민한 젊은 보보는 곧 또 한 마리의 돼지를 입에 쑤셔 넣고 있었다. 그 중 반쪽을 떼어내 아버지 손에 넘겨주고는 여전히 큰소리로 외쳤다.

잡수세요. 잡숴요. 불에 탄 돼지에요. 잡수세요. 아버지. 일단 맛만이라도 보세요. 제발

이렇게 야만스런 소리를 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숨 막힐 만치 고기를 먹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호티는 그 무시무시한 것을 손에 들고 있기만 해도 몸의 마디마디가 떨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인간답지 않은 마귀라 생각하고 죽어버릴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보보가 그랬던 것처럼 오돌오돌하게 탄 돼지 껍데기에 호티도 손가락을 데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댄 호티 또한 보보처럼 그 맛을 보았다. 온몸이 떨리도록 황홀한 그 맛!

부자는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한 어미돼지의 새끼 중 남은 것을 깨끗이 먹어치우기까지 한시라도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아버지는 보보에게 절대 이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는 엄한 명령을 내렸다. 신이 내린 고기 맛에 길들여져 더욱 더 고기 생각이 간절해지는 이 부자의 무시무시한 생각을 알게 되면 이웃사람들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꼭 돌로 쳐 죽일 것만 같았다. 그리고 곧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호티의 오두막집이 놀랄 만치 여러 차례나 불이 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눈치 채기 시작했다. 화재는 자꾸 일어났다. 때로는 대낮에, 때로는 밤에도 예고 없이 일어났다. 암퇘지가 새끼를 낳기만 하면 호티의 집에는 여지없이 불꽃이 타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눈에 띈 일은 호티 자신이 자식을 혼내주기는커녕 전보다 더 관대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웃의 감시를 받게 되었으며 그 무서운 비밀은 결국 탄로 나고 말았다. 부자는 재판을 받기위해서 그 당시에는 별로 크지도 않은 순회재판이나 열릴 뿐이던 작은 마을인 북경으로 호송되었다. 증거물로서 기분 나쁜 음식은 법정에 제출되었고, 막 판결이 선고되기 직전이었다.

재판관은 증거물로 제출된 물건에 손을 대 보았다. 그리고 여러 배심원들에게도 그 증거물을 만져 보라고 했다. 보보와 아버지가 그랬듯이 이들도 고기가 닿은 손을 입에 넣었다. 대자연은 그들에게 같은 손가락 치료법을 택하게 하여서 모든 사실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또 검사가 한 가장 뚜렷한 고발내용에도 불구하고 전 법정, 시민, 외국인, 법정서기, 기타 참석한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고, 배심원들은 그 자리를 뜨지도 않고 아예 다시는 어떤 논의도 없이 이구동성으로 무죄 선고를 내리고 말았다.

검사는 눈치 빠른 사람이어서 그 선고의 분명한 부당성을 눈감아 주고 말았다. 게다가 증거물은 어차피 다 먹어치워 버려 사라졌기에 무죄일 수밖에 없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법정이 해산되기 바쁘게 호의로 얻을 수 있거나 돈으로 살 수 있는 돼지를 모두 비밀히 손에 넣었다. 며칠 후 그 재판관의 저택에서도 불길이 올랐다.

 

이 일은 날개가 돋친 듯이 퍼져 나가 사방을 둘러보아야 눈에 띄는 것은 오직 타오르는 불길뿐이었다. 그 지방 일대에서는 땔감과 돼지 값이 엄청 올랐다. 보험회사는 모두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점점 간단한 주택만을 지어 나갔기 때문에 건축학이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될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집을 태우는 풍습이 계속되었는데, 내가 가진 판본에 의하면 드디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우리나라의 존 로크(경험주의 철학자)와 같은 현인이 나타났다. 그는 돼지고기, 아니 어떤 다른 동물의 고기를 굽기 위해서는 집 한 채를 모두 태우지 않아도 구울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엉성한 모양을 한 석쇠가 비로소 등장했다. 끈이나 꼬챙이에 고기를 꿰어서 굽는 기술은 어느 왕조 때의 일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보보사건이 있은 후 1,2세기 뒤에 와서야 개발되었다. 이처럼 천천히 발전하여 가장 유익하고도 겉으로 보아서 가장 확실한 기술이 인류에게 행하여져 온 것이라고 그 판본은 결론짓고 있다.

 

위의 이야기를 전부다 믿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다음의 것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 집에 불을 질러서라도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모든 구실이나 변명을 그 어떤 요리에 견줄 수 있다고 한다면, 역시 통돼지구이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모든 음식의 세계의 모든 맛있는 것 중에서도 나는 이것을 가장 맛있는 것, ‘맛으로 으뜸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다 자란 돼지로 어미돼지와 새끼 돼지 사이의 것, 그러나 갓 난 돼지는 아니다. 즉 여리고 귀여운 젖먹이-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아예 돼지우리의 더러움을 타지 않고 조상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관습인 오물을 사랑하는 원시적인 악벽(惡癖)이 아직 현저하지 않은 것, 그러니 목청이 아직 변하지는 않았지만 어린애 같은 높은 음성과 늙어 웅얼거리는 소리 사이의 음성 비슷한 것을 가진- 돼지를 말한다.

이런 돼지는 꼭 구워먹을 일이다. 우리 조상들은 아마 물에 삶거나 끓여 먹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니 돼지가죽을 얼마나 낭비했을까!


   이름도 좋은 통돼지 구이. 맛 중에서 그것은 최고의 맛이다. 파인애플의 맛도 대단하다. 그러나 통돼지구이의 맛은 너무나 뛰어나다. 아삭아삭하게 황갈색으로 조심해서 익힌, 지나치게 굽지 않도록 한 그것과 견줄 수 있는 맛은 이 세상에 또 없다고 나는 주장할 셈이다. 이 음식의 최고의 장점은, 수줍은 듯하고 부서지기 쉬운 그 가죽의 저항력을 잘 다루며 씹는 쾌감에는 우리의 이빨 까지도 그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는데 있다. 착 달라붙는 기름기, 그것을 지방질이라고 부르지는 말자. 또 차츰 지방질로 변해가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아름다운 맛. 그 지방질의 여전히 연한 비계 덩어리, 꽃봉오리인 상태에서 순이 꺾인 듯한 그 지방질. 움이 틀 무렵에 잘린 아직도 철모를 때의 새끼돼지는 지방질이 없는 고기라고나 할까. 아니 그렇지도 않다. 하늘에서 내린 일종의 만나, 아니 차라리 지방질이 있는 고기와 보통 살코기가 서로 섞이고 열려져 하나로 뭉쳐, 신들을 위한 음식이 되거나 어떤 공통된 물질이 된 것이 아닐까? 오늘날 그 요리가 되는 과정을 보라. 그것이 한 몸에 받는 것은 그 몸을 태우기 위한 열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분을 상쾌하기 위한 온기인 것 같다. 꼬챙이에 꿰어져 일정한 속도로 빙빙 도는 그 모습. 요리가 금방 끝났다. 그 어린 나이의 지극히 민감한 모습을 보라. 그 어여쁜 두 눈-빛나는 젤리이며 유성(流星)-으로 울었던 것이다.

새끼 돼지의 제2의 요람인 접시 위에 놓여있는 그 모습을 보라. 얼마나 유순하냐. 우리는 이 철없는 것이 자라나 흔히 성장한 돼지라고 할 때 연상되는 추악한 것이나 순종할 줄 모르는 것이 되기를 원하는가? 내버려두면 틀림없는 대식가, 게으름뱅이, 고집통이, 또 불쾌한 짐승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통구이 새끼돼지만은 그런 죄를 면하게 되는 것이다.

 

돼지는 까다로운 맛을 비평하는 사람에게도 만족을 주고 또한 식욕을 돋구어 준다. 몸이 튼튼한 사람도 맘껏 먹거니와 허약한 사람도 그 국물을 싫어하지 않는다.

선과 악은 서로 얽혀서 한 묶음으로 된 채 쉽게 풀리지 않으며,  풀면 어떤 위험이 뒤따른다는 인간의 복잡한 성격과 달리 돼지는 아주 훌륭하다. 이쪽이 좋다거나 저쪽이 나쁘다거나 하는 일이 없다. 그 작은 몸은 어느 쪽이나 고르게 쓸모가 있다. 연회석상에서 맛있고 없는 부분 때문에 시기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음식이다.

나는 내 신분에 맞게 들어오는 이 세상의 좋은 것은 마음대로, 조금도 아낌없이 친구에게 나눠 줘 버리는 성격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이다. 친구와의 나눔, 분수에 맞는 만족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것들과 똑같은 관심으로 대하는 사람임을 밝혀둔다.

 

친애하는 요리인이여, 당신들의 미각에 맞게 하기위하여 통돼지구이를 움파에 담고, 향기가 강하고 숱한 마늘을 그 순대에 담아도 맛은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돼지고기 맛은 변하지 않으며, 그 맛 이상으로 강하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라. 새끼돼지는 약한 자다. 한포기의 꽃인 것이다.<>

 

 

찰스 램

18세기 영국의 수필은 애디슨과 스틸, 새뮤얼 존슨, 올리버 골드스미스와 같은 대가들에 의해 모양이 갖추어져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찰스 램(1775~1834)은 영국 수필의 대가 중 한 사람으로 1820년에 나오기 시작했던 엘리아 수필집 Essays of Elia이 수필문학의 대표작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찰스 램의 수필은 삶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그의 재능을 통해 해학·공상·감정을 결합시키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을 매우 개인적인 문체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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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은 <세계의 수필문학>에서 발췌한 두 번째 이야기로 찰스 램의 <통돼지 구이론>이다.

이글을 통해 여러분은 수필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재미는 풍자와 상상력이 결합하여 독특한 맛을 자아낸다. 어리석은 인간은  불에 익혀진 돼지고기 맛을 알자 집을 태우기 시작한다. 이 맛이 전 도시에 알려지면서 도시의 집들은  끊임없이 불살라 진다. 한 현자가 나타나서 돼지를 굽기 위해 집에 불을 지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전까지 말이다 .  집을 태우지 않게 하기 위해  현자가 고안한 것이 석쇠다. 그 발명품 덕분에 사람들은 돼지를 굽기 위해 집을 태우지 않아도 되었다는 이 우화적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했기에 매력적으로 들려지는 것일까.

인간들의 우매성은 소수 선각자나 현자의 깨달음에 의해서만  바꿔어진다는 통찰력이 들어있기 때문은 아닐까?  또한 인간의 맹목적에 기인한 우매성(혹은 편견과 집착)이 얼마나 빨리 삽시간에 전파되며 그 파괴성을 발휘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스 램은 익살을 떤다. 통돼지 구이는 어느 부분이나 동일하게 맛이 있어 인간의 편견때문에 불평하거나 다투는 일이 없이  공평하다고 .  인간에게 있어 '선과 악은 서로 얽혀서 한 묶음으로 된 채 쉽게 풀리지 않으며,  풀면 어떤 위험이 뒤따른다는 인간의 복잡한 성격'을 초월하는 것이 이 통돼지 구이의 공평한 맛이다. 그리하여 결국 ' 새끼돼지는 약한 자다. 한포기의 꽃인 것이다.' 라고 선언하므로써  통상 더러움과 게으름의 상징인 돼지에게 최고 찬사를 보낸다는 역설을 시도한다.

   이런 점이 수필이 보여주는 묘미이다.    


  통상 글 속에는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사상이 담겨져 있겠지만  그저 생각나는 대로 쓴 글에서 자신의 내적 표현은 무심결에 흘러나오고, 그 속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사실 문학 장르의 하나로써 수필이란 그런 역할을 하기에 적당하다. 흔히 수필을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라고 한다. 그런데 붓 가는 대로 쓰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억지로 짜낸 글은 어색하고 불편하다. 논리의 전개를 중시하는 논설은 논리의 모순이나 억지 주장이 드러난다. 그냥 편하게 쓴 글은 내용이 부실하기 십상이고, 자신의 체험을 쓴 글은 흥미를 더해 줄지 모르나 그 내용에 형평성을 잃어버리면 공감대를 얻기가 어렵다

   막상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아 무엇을 어떻게 쓸까 고민해본 사람은 자신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수많은 생각의 갈래에 놀라게 되고, 생각의 갈래는 헝클어져 뭉쳐있다. 또한 그 생각 중 한 가지를 골라 글로 표현하려하면 글은 쉽게 논리적 요체를 상실하고 갈 길을 잃는다. 생각과 표현의 괴리다. 퍼득 떠오른 생각, 막막한 가운데 한 가닥 길이 보이는 듯해서 따라가 보지만 언어는 길가에 놓인 수많은 장애물로서 나타나다. 발뿌리에 차이는 돌 때문에 걸을 수 없다. 생각의 길에 놓인 표현의 장애물을 치우느라 글은 엉망이 된다. 그래서 글을 많이 써 본 사람들도 늘 그런 문제 앞에 고민한다.


     붓 가는대로 슬슬 글을 잘 쓴다면 글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처음부터 그렇게 슬슬 글이 풀릴 리 없다 글쓰기도 일종의 기술이다.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부단히 노력해서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육체적인 기술이나 기예를 익히면 그에 따른 근육이 발달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계속하면 사고의 근육이 발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글쓰기는 육체 노동에 의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덤이 주어진다. 영감이라는 창조적 능력이다. 영감은 마치 자신의 머릿속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처럼 느껴진다. 영감에 의해 쓰여진 글에는 스파크가 있다. 작가와 독자가 함께 감전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그라운드다.  예술이라는 것 또한 그런 놀이를 하는 분야이다. 영감에 의한 글쓰기는 희열을 준다. 

 

   생각에는 결이 있다. ()란 말은 ()의 결이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옥을 다루는 장인은 옥의 결을 따라 정을 쪼아 의도한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한번이라도 실수하면 옥은 엉뚱하게 갈라져 비싼 댓가를 치룰 수밖에 없다. 생각은 이치의 결을 따라 형상을 만들기에 명료해야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명료하지 않다. 이 세상 일은 복잡하고 무수하게 얽혀 있어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가에 따라 달리 보인다. 생각의 명료함이란 그 선택적 길이다. 그 이치의 길을 따라 논리를 전개해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료한 정신과 논리로만 이 세상을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삶은 때로는 우연으로, 이해 불가한 그 무엇으로 나타나며 비가시적인 세계, 현실을 넘어선 그 무엇을 담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엇이 인간적인 것인가 하는 관점을 견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글 속에 진정성이 드러나는가이다. 그 진정성은 인간의 삶과 조건을 담지한다. 진정성이 드러나는 글은 엉성하고 빈약해도 강하다. 강한 힘 속에 아름다움이 깃들인다. 진정성이 없는 글은 아무리 현란해도 속빈 강정같다.

   결국 글이란 작가의 내면세계를 반영한다. 어떤 글이든 작가의 품격, 관점과 성향, 지성과 사상을 담고 있다. 작가의 내면세계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독특함이 있을 때 그 글 속에서 힘과 생명력을 느낀다.  작품의 아우라이다. 동양화에서 기운생동(氣韻生動)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것과 같다.


   문장은 복잡한 유기체적 구성물로 우리 앞에 주어진다. 주제 의식을 표현하기는 고사하고 문장의 복잡성, 어법의 혼란 때문에 숨이 막히기도 하다언어어차피 인간의 사고와 문화적 구조 속에서 형성된 것이지만 모호하기는 인생과 마찬가지다.

   프랑스의 문인이자 비평가인 모리스 블랑쇼는 이렇게 말한다.

  “문학이란 모호한 인생과 모호한 언어가 만나 결혼하는 것이다.”


   문장은 간결 명료해야 한다. 그저 주어와 술어에 충실하면 된다. 군더더기는 필요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쓰기가 가장 어렵다. 간결 명료한 문장이란 단순히 문장이 짧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길고 끈적거리고 복잡하게 얽힌 문장이라도 잘 쓰여진 글에서는 의미가 반짝이는 보석처럼 드러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의 갈래를 풀어내기 위해 아주 복잡한 문장을 구사해 나간다. 그리고 절망적이 된다. 

   다행히 수필은 조금은 모호하고 조금은 모자라도 이해해 준다풍성한 디테일만 주어진다면 그것으로도 족하다. 인생이 그러하듯이 결국 우리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을 즐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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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램

 

                                                               피천득(수필가)


 

나는 위대한 인물들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나와의 유사성이 너무나 없기 때문인가 보다.

나는 그저 평범하되 정서가 섬세한 사람을 좋아한다.

동정을 주는 데 인색하지 않고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곧잘 수줍어하고 겁 많은 사람, 순진한 사람,

아련한 애수와 미소 같은 유머를 지닌 그런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찰스 램 (Charles Lamb, 1775-1834)은 중키보다 좀 작고 눈이 맑고 말을 더듬었다.

술을 잘하고, 담배를 많이 피우고, 친구와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남에게서 정중하게 대접받는것을 싫어하였고 자기를 뽐내는 일이 없었다.

그는 역경에서도 인생을 아름답게 보려 하였다.

램은 두뇌가 총명하고 가세가 넉넉지 못한 집 아이들이 가는 유명한 자선학교 크라이스트 호스피털에서

7년간 수학을 하였다. 그 후 그렇게도 가고 싶은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잠깐 남해상사를 거쳐 1792

동인도회사에 취직하여 1825년까지 삼십여 년 회계사무원 노릇을 하였다.

 

그는 불행하였다. 발작적 정신병을 앓는 누님을 보호하면서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그는 두 번 여성에게 매력을 느낀 일이 있다. 그 중의 한 여성은 <꿈속의 아이들-환상>에 나오는 엘리스이다.

꿈속의 아이들은 응석도 부리고 애교도 떨다가매정하게도 이런 말을 하고 사라져버린다.

우리들은 엘리스의 아이가 아닙니다. 당신의 아이도 아닙니다. 아예 아이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것조차없습니다. 꿈입니다.

엘리스의 아이들은 버트람을 아버지라고부릅니다.” ‘버트람은 엘리스가 결혼한 사람이다.

또 한 사건은 그가 마흔네 살이 되고 연 육백 파운드 봉급을 받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 페니 케리에게 청혼을 하였다. 그리고 즉시 상냥하고 정중한 답을 받았다.

저의 애정은 이미 다른 분에게 가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의 작은 로맨스는 하루에 끝이 났다.

 

그는 오래된 책, 그리고 옛날 작가를 사랑하였다. 그림을 사랑하고 도자기를 사랑하였다. 작은 사치를 사랑하였다.

그는 여자를 존중히 여겼다. 그의 수필 <현대에 있어서의 여성에 대한 예의>에 나타난 찬양은

영문학에서도 매우 드문 예라 하겠다. 그는 자기 아이는 없으면서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였다.

어린 굴뚝 소제부들도 사랑하였다. 그들이 웃을 때면 램도 같이 웃었다. 그는 일생을 런던에서 살았고,

그 도시가 주는 모든 문화적 혜택을 탐구하였다. 런던은 그의 대학이었다. 그러나 그는 런던의 상업면을 싫어하였다.

정치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기 학교, 자기 회사, 극장, 배우들, 거지들, 뒷골목 술집, 책사,

이런 것들의 작은 얘기를 끝없는 로맨스로 엮은 것이 그의 <엘리야 수필>들이다.

그는 램()이라는 자기 이름을 향하여 나의 행동이 너를 부끄럽게 하지 않기를. 나의 고운 이름이여라고 하였다.

그는 양과 같이 순결한 사람이었다.[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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