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다 지쳐 남긴 회춘탕 국물이 눈에 선하다… 강진의 산해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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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청자골 종가집'의 한정식 상차림.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다. 몇몇 찬은 상 아래에 놓았고, 아직 밥과 국은 들어오지 않았다. 밥상 위 그릇을 유심히 보시라. 모두 청자다. 강진의 음식 문화는 한정식에서 꽃을 피운다. 손민호 기자
남도 맛 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장이 강진이다. 강진은 바다와 밭, 강과 산에서 나는 식재료가 풍부하며 무엇보다
고유한 음식 문화가 있다. 하여 ‘일일오끼 강진 편’은 준비 과정이 지난했다. 대표 음식을 5가지로 추리는 데 애를 먹었다.
강진군청과 강진군 문화관광재단이 추천한 명단도 너무 길었다. 고민 끝에 강진만의 대합과 개불, 그리고 목리 장어를 뺐다.
식당을 고르는 건 더 어려웠다. 식재료나 식당이나 시방 현장의 평판을 우선했다. 참, 마량포구의 터줏대감 ‘완도횟집’은
휴업 중이었다. 할머니가 편찮으시단다. 강진 대표 음식이랍시고 겨우 5개를, 그것도 짤막한 설명만 나열하는 꼴이 초라하다.
음식 하나하나에 밴 거대한 서사는 각자 입으로 느끼시라.
12월은 진상품 옴천토하의 계절 아침은 얼큰하고 개운한 짱뚱어탕 돼지불고기 밥상엔 반찬만 20개
상다리 휘어질라 푸짐한 한정식 문어·토종닭·전복이 만난 회춘탕
강진군 옴천면에서는 12월이 오면 토하를 잡는다. 논을 개량한 서식지에서 토하를 거둔다. 물에서 갓 들어올린 토하가 펄떡거린다. 손민호 기자
굳이 12월까지 기다려 강진에 내려온 건, 새끼손가락 첫때 마디만 한 민물새우 때문이다. 토하.
이 새우로 담근 젓갈이 수라상에 올랐다. 그 명성은 여전하다. 남도에서 토하젓이 없으면 양반 밥상이 아니라고 했으며,
강진 한정식도 토하젓 종지가 놓여야 비로소 완성된다고 했다. 특유의 맛도 맛이거니와 토하 자체가 워낙 귀하다.
토하는 맑고 깨끗한 계곡물에서만 산다. 이제는 거의 사라져 생물은 구경하기도 힘들다. 그 귀한 새우가 강진에 모여 산다.
강진군 맨 북쪽의 산골 마을 옴천면이 유서 깊은 토하의 고장이다. 꼬막 앞에 벌교가 붙듯이 토하 앞에는 으레 옴천이 붙었다. 옴천토하. 이래야 격이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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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장한 토하를 1년 숙성한 뒤 갖은 양념을 하면 토하젓이 된다. 비리지 않고 고소하다. 손민호 기자
한정식 밥상에 오른 토하젓. 토하젓 종지가 있어야 제대로 된 한정식 밥상 대접을 받는다. 손민호 기자
옴천(唵川)면은 이름처럼 별난 마을이다. ‘옴’이라는 한자가 ‘맑은 시냇물 졸졸 흐르는 소리’를 의미한다. 처음 본 한자다.
김국혼 옴천면장이 “옴천은 나가는 물만 있고 들어오는 물은 없다”고 말했다. 바깥에서 오염된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옴천면은 전국 최초로 면 전체가 친환경농업특구로 지정됐다. 현재 인구는 717명. 전국 3502개 읍·면·동 중에서
5번째로 인구가 적다.
옴천에서 네댓 가구가 토하를 기른다. 먹이를 주지 않으니 양식은 아니다. 논을 개량한 서식지에 물을 받아놓고,
물을 계속 흐르게 하면 토하가 알아서 자란다. 대신 토하를 잡아먹는 물고기·벌레 따위를 수시로 잡아줘야 한다.
그 토하를 12월에 잡는다. 잡은 토하는 천일염에 절여 1년을 숙성한다.
염장한 토하에 고춧가루·찹쌀죽·당근 등 비법 양념을 하면 토하젓이 완성된다.
‘옴냇골토하’ 임정열(50) 대표가 담근 토하젓을 찍어 먹었다. 비린내는커녕 흙냄새도 없었다. 그저 달고 고소했다.
뜨스운 밥이 간절했다. 1종지(600g) 4만원.
강진의 겨울은 봄보다 화려하다. 은빛으로 반짝이다가 금빛으로 번쩍이는 강진만 갈대밭 덕분이다. 이 갈대밭 아래 갯벌에 짱뚱어가 산다. 지금은 겨울잠에 들어가 뛰어놀지는 않지만, 이 순수한 진흙 안에서 짱뚱어가 꿈틀대는 것을 우리는 안다. 손민호 기자
짱뚱어만 생각했다면 완연한 봄날에 내려왔어야 한다. 짱뚱어가 갯벌에서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계절이어서다.
지금은 강진만 갈대밭을 아무리 헤집어도 허탕만 친다. 짱뚱어가 겨울잠에 들어갔다.
기온이 떨어질수록 짱뚱어는 진흙 속으로 파고든다.
그래도 남도 갯벌 하면 짱뚱어다. 강진만을 따라 드넓은 갯벌을 거느린 강진도 짱뚱어의 고장이다.
강진에는 더욱이 짱뚱어 장인으로 통하는 인물이 있다. 강진읍시장 건너편 ‘강진만 갯벌탕’의 이순임(68) 대표.
열세 살 때부터 갯벌에 나가 짱뚱어를 잡았으니 55년 세월을 짱뚱어와 살고 있는 ‘짱뚱어 전도사’다.
짱뚱어 장인 이순임 대표. 손수 잡은 짱뚱어로 탕을 끓인다. 올해로 55년째 강진만 갯벌에 나가 짱뚱어를 잡는다고 했다. 손민호 기자
“낚시 바늘 4개를 실로 묶어서 하나로 만들어. 그걸 7m 길이 낚싯대에 매달고. 휙 한 번 던지면 짱뚱어가 걸려 와.
실패가 없지. 하루 1000마리도 잡았다니까.”
이 대표는 손수 잡은 짱뚱어로 탕을 끓인다. 남도의 갯마을마다 긴 내력의 짱뚱어탕 집이 있지만,
이 대표처럼 직접 잡은 짱뚱어를 쓰는 집은 드물다. 펄펄 끓는 뚝배기가 나왔다. 뜨거운 김과 함께 매콤한 향이 확 퍼졌다.
강진의 대표적인 짱뚱어 음식점 ‘강진맛 갯벌탕’의 부엌에서 짱뚱어탕 뚝배기가 끓고 있다. 짱뚱어탕은 진정한 갯벌의 맛이다. 손민호 기자
“양념? 묻지 말어. 무지하게 들어가. 국물도 다 먹어. 약이여 약. 장어는 기어다니제? 짱뚱어는 날아댕겨.”
남도 억양에 얹힌 이 대표의 너스레가 귀에 착착 감겼다. 가을에 잡은 짱뚱어를 얼려놓은 것이라 해도
구수하고 걸죽한 국물은 그대로였다. 밑반찬에 칠게젓이 있었다. 갯벌탕(짱뚱어탕)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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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송한 불고기 밥상
병영성. 지금의 강진군 병영면은 전라병영성이 설치됐던 호남 최대의 군사도시였다. 손민호 기자
강진에는 조선 시대 번성했던 두 마을이 있다. 북쪽 내륙의 병영과 남쪽 해안의 마량이다.
두 마을 모두 군사도시로 시작됐다. 마량에는 수군 진영이 구축됐고, 병영(兵營)은 이름 그대로 군사가 주둔한 지역이었다.
지금의 강진군 병영면은 전라병영성이 설치됐던 호남 최대의 군사도시였다.
한때 병영성에는 2만 명이 넘는 주민이 거주했다. 당연히 시장도 발달했다.
“북엔 개성상인 남엔 병영상인”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음식 문화도 덩달아 진화했다. 그 영화의 세월이
병영불고기에 남아 있다. 연탄불에 구운 양념 돼지고기 요리다. 흔한 음식이라지만, 병영의 돼지불고기는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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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관’은 병영불고기 명가다. 연탄불에 구워 불맛이 확 나지만, 고기는 매우 부드럽다. 한 입 씹으면 입 안에서 육즙이 터진다. 손민호 기자
병영에는 명성이 자자한 불고기 집 두 곳이 있다. ‘수인관’과 ‘설성식당’이다. 호불호가 갈린다.
수인관은 상차림이 깔끔한 반면, 설성식당은 대폿집 모양 분위기가 편안하다. 외지에 먼저 알려진 건 설성식당이었다.
그러나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수인관은 아들 신성준(38)씨가 부모 신정일(67)·이복임(66)씨에 이어 지키고 있다.
수인관을 찾아갔다.
수인관의 병영불고기 밥상. 족발, 토하젓, 호박된장찌개, 홍어 등 20가지가 넘는 반찬이 나온다. 손민호 기자
상차림이 한정식 못지 않았다. 불고기 말고도 20가지 넘는 반찬이 청자 그릇에 담겨 나왔다.
불고기 아래에 초를 피워 고기를 데우는 감각이 돋보였다. 연탄불 특유의 불맛이 강했으나, 육즙이 살아 있었다.
양념은 매콤하면서도 달큼했다. 아버지가 양념 된 고기를 저온 숙성하는 기술로 특허를 받았다고 했는데,
숙성에 비법이 숨어있는 듯했다. 4인 3만6000원. 1명 9000원짜리 밥상인 셈이다. 차라리 황송했다.
병영양조장 김견식 대표. 대한민국 식품명인이다. 올해로 61년째 술을 빚고 있지만, 막상 본인은 술을 한 모금도 못 한다고 한다. 손민호 기자
예부터 병영에는 양조장이 많았다. 병영성의 흔적이다. 그 전통이 병영양조장까지 이어진다.
병영양조장의 김견식(80) 대표는 대한민국 식품명인이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청와대 만찬 때 쓰였다는 병영설성막걸리를
빚은 주인공이다. 놀라운 건, 61년째 술을 빚는다는 명인이 술을 한 모금도 못 한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좋은 술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정확하게만 만들면 좋은 술이 나온다. 향만 맡아도 된다”고 대답했다.
양조장에서 막걸리도 판다. 1박스(20병) 2만4000원.
강진의 음식 문화는 한정식에서 꽃을 피운다.
직원 2명이 반찬 그득한 밥상을 맞들고 방에 들어올 때부터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큼직한 밥상은 삼합·생고기·보리굴비·전복회·토하젓·육전 등 남도의 산해진미 30여 가지로 빼곡하다.
우리가 강진 한정식이라고 부를 때 꼭 있어야 하는 음식이 있다. 의외로 찰밥이다.
찰밥과 구운 김이 화려한 반찬과 나란히 나온다. 반찬만 먹다간 맛을 놓칠 수 있어 마련한 일종의 배려다.
진짜 밥은 나중에 된장국과 같이 나온다. 남도 한정식이라고 하면 삼합·굴비·생고기(육회)·토하젓 등이 필수 메뉴다.
한정식은 생선회·해산물·나물 같은 찬 음식부터 먹는 게 순서다.
강진의 한정식 명가 '청자골 종가집'. 100년 넘은 한옥의 정취가 그윽하다. 손민호 기자
강진에는 이름난 한정식 집이 수두룩하다. 해태식당·명동식당·예향·다강 등등,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명가다.
이 명가 대열에 ‘청자골 종가집’도 들어간다. 100년 넘은 한옥의 정취가 그윽한 집으로, 이승철(35) 대표가 어머니
김은주(64)씨에 이어 운영하고 있다. 가장 자부하는 음식을 물었더니 대뜸 “김치”라고 답한다. 4∼5년 묵은 김치는
보통이고, 10년 삭힌 김치도 있단다. 김장을 하면 배추김치만 1200포기를 하는데, 꼬박 1주일이 걸린단다.
음식은 간이 심심한 편이었다. 양념도 강하지 않아서 부담이 덜했다. 최선을 다했으나 몇몇 반찬은 남았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4인 10만·12만·20만원상.
강진 읍내 '으뜸식당'의 회춘탕. 문어가 너무 커서 냄비가 넘칠 것 같다. 군청이 작성한 레시피대로 끓여야 회춘탕을 판매할 수 있다. 손민호 기자
회춘탕. 솔직히 이름만 들었을 땐 거부감이 일었다. 먹을 게 넘치는 요즘 세상에 보양식이라니.
600년 전통의 향토음식이란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회춘탕의 역사는 마량포구에 조선 수군이 진영을 설치한 15세기까지 올라간다.
회춘탕이 각별한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문어·전복 같은 해산물과 토종닭을 온갖 약재와 함께 푹 고은 보양탕의 전통을 서양 레시피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강진군청은 2013년 광주여대 김지현 교수의 도움을 받아 회춘탕 레시피를 작성해 지역 식당에 전파했다.
현재 9개 식당이 레시피대로 회춘탕을 끓인다. 반응이 좋아 내년에 3개 식당이 추가된다.
군청은 회춘탕 특허 등록을 마쳤고, 식당이 레시피를 지키는지 직접 점검한다.
레시피가 꼼꼼하다. ‘문어 1마리(2㎏)’ ‘수삼 2뿌리(50g)’처럼 식재료의 크기와 수량을 명시하고
‘닭 삶은 물은 버려야 한다’고 구체적인 지침을 준다. 강진읍시장 남쪽 ‘으뜸식당’에서 맛봤다
국물이 의외로 깨끔했다. 오병국(59) 대표가 “12가지 약재로 국물을 낸다.
소금은 한 톨도 안 들어갔다”고 말했다. 4인 기준 11만원.
강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