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과 취미

[ 여름 밤 ] [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여풍2 2022. 7. 23. 11:59

[ 여름 밤 ] 노천명
  
앞벌 논가에선 개구리들이 소나기 소리처럼 울어 대고, 삼밭에선 오이 냄새가 풍겨오는 저녁,
마당 한 귀퉁이에서 엉겅퀴, 다북쑥, 이런 것들이 생짜로 들어가 한 데 섞여 타는 냄새란 제법 독기가 있다.
거기에는 모깃불 이외의 값진 여름 밤의 운치가 있다.
 
달 아래 호박꽃이 화사한 저녁이면, 군색스럽지 않아서 좋은 넓은 마당에는 모깃불이 피워지고,
그 옆에는 멍석이 깔려지고, 여기선 여름살이 다림질이 한창 벌어진다.
멍석에 이렇게 앉아 보면, 시누이와 올케도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고, 지긋한 나이를 한 어머니가 큰 아기에게 다림질감을 붙잡히고 들려주는 별처럼 머언 얘기가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저녁, 함지박에는 갓쪄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오란 옥수수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나오는 법이다. 
쑥댓불의 알싸한 내를 싫잖게 맡으며, 종아리에 덤비는 모기를 불부채로 날리면서 옥수수를 뜯어먹고 누웠으면,
여인네들의 이야기꽃이 핀다.
 
멍석으로 나오는 별식은 옥수수뿐이 아니다.
연자간에서 갓 빻아 온 햇밀에다 굵직굵직하고 얼쑹얼쑹한 강낭콩을 두고 한 밀범벅이 또 있다.
그 구수한 맛은 이런 도시의 식당 음식쯤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온 집안에 매캐한 연기가 골고루 퍼질 때쯤 되면, 쑥 냄새는 한층 짙어져서 가정으로 들어간다.
영악스럽던 모기들도 어릿어릿하면, 수풀로 반딧불을 쫓아다니던 아이들도 하나둘 잠자리로 들어가고,
마을의 여름 밤은 깊어만 간다. 그리고 아낙네들은 멍석 위에 누워서, 생초 모기장도, 불면증도 들어 보지 못한 채, 꿀 같은 단잠에 빠져든다.
 
쑥을 더 집어넣는 사람도 없어 모깃불의 연기도 차차 가늘어지고 보면, 주위는 바다 밑처럼 고요해진다.
굴 속에서 베를 짜던 마귀 할미라도 나와서 다닐 성싶은 이런 밤엔, 헛간 지붕 위에 핀 박꽃의 하이얀 빛이 나는 무서워진다.
 
한잠을 나고 난 아기는 아닌 밤중 뒷산 뻐꾸기 울음소리에 선득해서 엄마 가슴을 파고들고,
삽살개란 놈이 괜히 짖어 대면 마침내 온 동네 개들이 달을 보고 싱겁게 짖어 댄다. 

 

[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 놓고 / 밤이면 싫컷 별을 안고 / 부엉이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 삽살개는 달을 짖고 /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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