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만상

강가 초막(草幕)의 꿈

여풍2 2021. 7. 10. 23:07

■강가 초막(草幕)의 꿈■
                                                                     -엄상익/변호사

 

노년이 되면 서울을 벗어나 조용한 강가에 살고 싶었다.
어느 조용한 수요일 오전 양평의 물가에 있는 집들을 구경했다.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이는 강가 여기저기에 그림에서 본 것 같은 아름다운 집들이 지어져 있었다.
그런 곳에서 살다가 죽어 강가 뜰에 있는 나무 밑에 묻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중 세월의 이끼가 낀 듯한 오래된 집 한 채가 비어 있었다.
나를 안내한 부동산 중개인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 강가에 살던 영감님이 나이가 아흔 살이 됐어요.
돌아가실 때가 됐는지 집을 내놓고 병원으로 갔어요.”

당연한 사실이 새롭게 들렸다.
그 집주인은 영원히 그 집에서 살 수 없었다.
아프면 그 집을 떠나야 하고 세금 때문에 그 자식이 아버지의 집에서 계속 살 수 없었다.

그 영감은 강가의 자기 집 뜰의 나무 밑에 묻힐 수가 없는 것이다.
저녁 강가의 행복이 새어 나오는 아름다운 집은 나의 낭만인 것 같았다.


강가 한적한 동네인 그 이웃의 또 다른 집을 가 보았다.
서양식 정원에 강가를 향해 넓은 통유리창을 한 집이었다.
파란 강물이 거실을 향해 흘러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육십대 말쯤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참 경치가 좋으네요”
내가 창 밖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부는 내 말에 침묵했다.
그들의 눈에 이미 강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떤 좋은 경치도 며칠이 지나면 없어지게 되어 있다.
아무리 좋은 그림이나 골동품도 집에 가져다 놓고 일주일이 지나면 그 존재가 의식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어떻게든 집을 비싸게 팔고 거기를 떠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늙어서 쉴 곳을 찾느라고 전국을 다녀 보았다.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고향집 같은 곳을 만나고 싶었다.
제주도로 가서 그곳으로 이주한 부부를 만나 물어보았다.
“낮에는 주변 경치가 기가 막혀요.
그런데 밤이 되어 우리 부부가 어둠 속에 갇히면 둘이서 부둥켜 안고 떨어요.”
낮과 밤이 다른 것 같았다.


경기도 장흥 근처에 집을 샀다가 되판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산 자락 경치가 기막힌 곳 바위 위에 지어진 집을 샀어. 일제 시대 일본인 고위관료가 살던 집이래.
정말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어. 그런데 밤이 되니까 그게 아니야.
늑대 소리도 들리고 서울의 도망친 개들이 전부 북한산 속으로 들어와 진을 치고 있는 것 같았어.
그래서 당장 집을 팔고 나와버렸지.”

그래도 나는 고집을 부렸다.
강가가 아니면 조용한 어촌 포구의 잔잔한 바다가 앞에 보이는 허름한 집은 어떨까도 생각했다.
남해의 바닷가 마을에 갔었다. 마음에 드는 작은 집이 있었다.
일부러 밤이 오기를 기다려 아내와 함께 어촌마을을 걸어 보았다.
방파제 위에 드문드문 외롭게 서 있는 수은등이 콘크리트 바닥 위를 무심히 비추고 우글거리는 파도가

소리치며 방파제를 두드리고 있었다.
밤의 어촌마을은 유령만 돌아다니는 폐허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류시화 시인이 쓴 수필 한 편이 떠올랐다.
제주도 바닷가에 아파트를 한 채 얻었다고 했다.
그런데 평일의 밤이 되면 아파트의 불들이 거의 다 꺼져 있고 관리사무소와 시인이 사는 집만

사람이 살더라는 얘기였다.
바닷가에 나가도 사람이 없어 마치 진공 속에 혼자 앉아있는 기분이더라고 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소설가 한수산의 수필에서 본 내용이었다.
오래 전 여주의 강가에 평생 소원이던 넓은 집필실을 마련했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갑자기 포크레인이 땅을 파는 소리가 계속되면서 계속 여기저기 집이 지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4대강 개발이 박차를 가해지면서 이포보를 만드는 소란에 아침이면 들려오던 새소리도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그는 결국 집필실 문을 닫고 다시 서울의 오피스텔을 얻어 돌아왔다고 적고 있었다.

아름다운 강가의 그림 같은 오두막은 꿈에서 그쳐야 할 것 같았다.
어떤 아름다운 경관도 그 안에 들어가 사흘이면 없어진다고 했다.
폭포 아래 마을 사람들이 물소리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일본 작가 엔도 슈샤쿠는 아주 작은 골방에 들어가 글을 썼다.
엄마의 자궁을 연상하는 작은 방에서 안정감을 찾는다고 했다.
나도 나의 작은 골방에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꿈은 꿈으로 끝을 내야겠다.
(옮긴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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