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방황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여풍2 2021. 3. 29. 07:49

전도서 1장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앋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는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5.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16.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7. 내가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도서 1장 묵상하기 /SFC 날마다 주님과

 

영원에 이르는 삶을 위하여

1. 헛된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것
전도서는 "헛되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전도서의 주제는 헛된 것을 말하면서, 반대로 헛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전12:13)로 결론이 맺는다. 결론은 항상 옳고 자명하다. 그런데 헛되다는 단어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전도서의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헛되다는 히브리어 단어가 가진 의미는 문법적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고, 단지 사용된 문맥을 통해서 정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용례가 8:14절의 경우이다.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여기 헛된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이 아니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그래서 해 아래의 세상사를 다 이해할수 없다는 탄식의 고백이 헛되다는 말이다. 이해하기 위해서 지혜와 지식을 많이 가지려고 한다해도 성공할 수 없다(1:14).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 바람을 잡을 수 없듯이 다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헛되다는 히브리어 단어(חבל)는 영어로 vain, meaningless, worthless 등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incomprehensible, enigmatic, mysterious, impossible to understand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헛되다의 이런 이해는 전도서를 잘 이해하게 해 준다. 먹고 마시고 씨뿌리고 공부하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해 아래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한계 너머에 있는 참된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권한다.

2.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3).
유익하다는 말도 자주 사용된다(1.3; 2.11, 13 (2회); 3.9; 5.9, 16; 7.12; 10.10, 11). 여기서 유익이라는 말은 현실적인 보상, 혹은 물질적인 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속되는 유익'이다. 영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지 못하는 수고의 한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면 그런 유익을 해아리지 못한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한계과 수고의 한계이다.
모든 종류의 수고들, 세월(4), 해(5), 바람(6), 강물(7), 만물(8)이 끝없이 돌고도는 수고를 한다. 그래서 피곤하고 만족이 없다. 새 것이 없다(10). 그래서 기억되지 않는다(11). 그래서 모든 수고가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반문한다.

3. 모자란 것도 셀수 없도다(15).
옥덴은 12-15절을 전도자의 질문으로 16-18절은 그 질문에 대한 숙고라고 구별한다. 질문은 지혜를 가지고 수고하지만 그러나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하지 못하고 모자란 것도 셀수 없다고 한다. 결국 지혜의 한계를 탄식한다.
지혜와 지식을 많이 추구했지만(16) 심지어 반대되는 미련과 어리석음을 통해서 지혜를 추구했지만(17) 얻는 것은 번뇌와 근심이라고 고백한다(18). 결국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다.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다 이해하지 못하고 수고의 날들을 보내는 것이 인생이다. 아무리 공부해도 다 이해할 수 없다. 세상의 불의와 부족과 상처를 다 짚어내고 치료하지 못한다. 그러면 수고하지 말라는 것인가? 아니다. 인생의 한계와 지혜와 지식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현재의 삶에서 낙을 누리고(선을 누리고) 살아가도록 권한다. 타락한 인간의 자신감과 오만함 그리고 죄가 지배하는 세상 질서에 대한 과도한 확신은 금물이다.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선을 추구하면서 낙(선)을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더욱이 청년의 때에 더욱 그리하라고 권한다. 낙을 누리라는 말이 enjoy로 번역되지만 히브리어 단어는 선(tov)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을 누리는 삶을 낙을 누린다고 한다.

# 지혜와 지식이 많은 것을 알고 이해하고 일관성있게 줄을 세워서 파악하는 속성을 가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인간이 다 이해할만큼 만만한 세상이 아니다. 죄가 개입된 세상과 우리의 지혜가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고 세상을 자포자기하면서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살수는 없다. 작은 현실적인 과제들에 성실하게 수고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지혜로 영원에 이르는 유익을 얻어야 한다. 바울은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배설물과 해로 여기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다. 같은 맥락이다. 세상의 모든 것 자체가 배설물과 해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렇게 여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바울은 즐거워하라고 빌립보서에서 강조한다. 영원에 이르는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즐거워하라고 한다.
세상 짐을 홀로 진듯이 너무 많이 근심하지 말고,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진실하자. 거기서 영원으로 이르는 유익과 지혜가 열린다.(옮긴글)



▶전도서Ecclesiastes , 傳道書 - 다음백과, 위키백과 발췌

 

케투빔(성문서로 알려진 성서 정경의 3번째 부분)에 속한다. 요약 히브리어 성서에서 〈전도서〉는 〈아가〉와 〈애가〉 사이에 있으며, 이 책들과 함께 유대 종교의 여러 절기에 읽히는 5개의 두루마리인 메길로트에 속한다. 보통 영역 성서는 70인 역의 순서를 따라 〈전도서〉를 〈잠언〉과 〈아가〉 사이에 놓는데, 이 순서는 솔로몬이 이 3권의 책을 다 저술했다는 옛 전승을 반영하고 있다. 〈전도서〉의 실제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글의 표제는 그 저자를 코헬레트(그리스어로는 ekkl?hsiast?s, 일반적으로 '전도자'로 번역됨)라고 말하며,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신원을 밝힌다. 이는 솔로몬을 가리키지만, 이 책에 아람어 표현 형식이 자주 사용되고 합리주의적인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작 연대는 BC 3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전도서〉는 삶의 허무함과 삶의 최선의 방법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생을 관찰함으로써 그가 확신하게 된 사실은 "발이 빠르다고 달음박질에 우승하는 것도 아니고, 힘이 세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며, 지혜가 있다고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슬기롭다고 돈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아는 것이 많다고 총애를 받는 것도 아니더라. 누구든 때가 되어 불행이 덮쳐오면 당하고 만다"(9:11)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그가 행한 선행과 악행에 달린 것이 아니며, 운명은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라고 저자는 주장한다(9:1). 이 신비를 알아내어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으려고 하는 시도는 모두 '헛되고' 무익한 일이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자기 성취를 위해 줄기차게 달려가지만 결국 공허함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종종 쾌락주의의 역설이라고 일컬어 진다. 우리가 진정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해, 자아에 대해 죽을 경우만이며, 우리가 참된 즐거움을 알게 되기 시작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을 향해 인간의 눈을 들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https://youtu.be/lWM2wMnwV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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