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평강

에벤에셀(도움의 돌)

여풍2 2021. 1. 26. 17:07

https://m.cafe.daum.net/jcpcprok/TZdK/274?q=%EC%97%90%EB%B2%A4%EC%97%90%EC%85%80%20%EB%8F%84%EC%9B%80%EC%9D%98%20%EB%8F%8C&

 

에벤에셀(도움의 돌)

에벤에셀(도움의 돌) / 삼상 7:12-17 어떤 나라에 아주 이름이 난 '명의', 용한 의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삼형제중 막내였는데, 사실 그의 두 형들도 '의사'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m.cafe.daum.net

 

에벤에셀(도움의 돌) / 삼상 7:12-17

 

어떤 나라에 아주 이름이 난 '명의', 용한 의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삼형제중 막내였는데, 사실 그의 두 형들도 '의사'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명의로 인정받은 이는 막내인 이 한사람뿐입니다. 

어느 날 왕이 그를 불러 질문을 합니다.

"너의 형들도 다 의원이라고 하던데 삼형제 가운데 누가 가장 훌륭한 의원이냐?"

"예, 저의 큰 형님이 정말 능력이 있으신 의원입니다. 

그리고 작은 형님도 저보다 몇 갑절 더 능력 있는 의원입니다. 저는 삼형제 중 가장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너를 명의라고 하느냐?"

"예, 저의 큰 형님은 환자를 만나면 그 안색만 보고도 어디가 좋지 않은지 알고, 큰 병이 되기 전에

그 부분을 미리 치료하여 주십니다. 하지만 환자들은 자기가 특별히 아프지도 않았었기 때문에, 

저희 형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형님을 용한 의사라고 말하지 않지요. 

저의 둘째 형님은 환자의 증세가 약하게 나타날 때 병세를 일찌감치 간파하시고 거기 맞는 방법으로

치료합니다. 환자는 고맙게 생각은 하지만, 그다지 아프다고 여기지 않았던 병이므로 누구나 고칠 수 있는

병이었다고 생각할 뿐, 우리 형님을 용한 의사로 생각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병이 중하여 큰 고통을 느끼고 견디기 힘들게 된 환자가 찾아오면 아주 독한 약을 써가면서

치료합니다. 환자들은 너무 아프고 괴로웠다가 나으니 제가 용한 의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소문을

내 줍니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저의 두 형님들이 저보다 훨씬 능력이 있는 의사이지요."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듭니까? 

우리는 뭔가 큰 문제가 생기고, 인생의 위기나 풍파를 만나서 그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여 주시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런 불행한 일, 고통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의 상황 속에서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할 줄은 모릅니다. 

그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주시는 것으로 여기고 살아갈 뿐이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일어난 큰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은혜, 기적"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 일 없이 위기를 넘기고 큰 탈이 나지 않은 상황에 대하여서는 그것은 '기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육신이 건강하신 분들은 '건강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지

건강하게 아무 탈 없이 살아갈 때는, 다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살아가는 줄로 생각하다가, 

몸에 어디 큰 탈이 나면 그제야 '하나님! 고쳐주세요' 기도하고, 치유 받으면 하나님이 고치셨다고 합니다. 

문제가 생기고 거기서 풀려나야 그것을 기적이라고 은혜라고 말하지 문제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일상에서는 "은혜도 기적도 생각할 줄을 모릅니다."

 

지난 시간에는 범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외친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우상을 섬긴 것을 범죄라고 보기보다는, 그들이 왜 우상을 섬겼는가를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나 제사지내는 것 등을 우상 섬기는 것으로 여기는 현대인들은, 

우상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언약궤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에는 어린 양의 희생의 피가 있는데, 

이스라엘은 그 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언약궤는 다만 국보 같은 물건이나 그들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것이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언약궤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은, 

결국 시선을 세상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의 은혜가 그들의 마음에 채워지지 않았기에, 

그들의 마음은 세상 것을 갈구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자연 인간의 갈망은 세상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부터 세상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한 것이 인간의 부패한 마음인데, 그 마음이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다면, 항상 부족과 목마름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부족을 채워줄 신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결국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희생의 은혜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여기에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범죄를 깨닫는데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1,2절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 그들이 언약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 놓은 지 이십 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여호와께 범죄하였다는 고백을 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궤가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20년을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받으며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20년의 세월은 결코 무의미하게 고생만 한 세월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고통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모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고통속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우상을 제하고,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는

사무엘의 외침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외침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회복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칠 때 하나님이 블레셋을 물리치심으로 증거 되었습니다.

 

12절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사무엘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하나 세웁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합니다. 에벤에셀이란 ‘도움의 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있습니다.

4:1절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쳤더니”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처음 전투할 때의 지명이 ‘에벤에셀’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에벤에셀에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와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돕지 않으신 결과라고 여기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현실을 하나님편에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돕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쟁에서 이기고 승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머물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이스라엘을 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해 언약궤를 가져온 이스라엘이 패배한 그 에벤에셀의 이름대로,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의 참된 의미를 알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의미로 에벤에셀이라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것은 지금 현재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10절의 승리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10절의 승리만을 두고 말한다면 ‘여호와께서 도우셨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제사장이 죽고 언약궤를

빼앗기고, 20년 동안 고통을 받고 살아온 모든 세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의 모든 세월까지 다 포함한 도우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벤에셀이란 기념비입니다. 곧 하나님이 여기까지 이스라엘을 도우셨음을 기념하는 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기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돌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우심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의 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무엇인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기념비는 에벤에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베게하던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부은 후에 ‘벧엘’이라고 한 얘기가 있고, 

여호수아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운 일이 있고, 

또 24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돌을 세운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돌들은 모두 기념비로서 단순한 돌이 아니라, 특이한 기능을 수행하는 돌이었던 것입니다. 

그 기능이란 하나님이 행하신 사건들을 증거하기 위하여 세워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수아 4:6-7절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 

돌의 기능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증거하는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곧 기념비들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의 백성을 위해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증거함과 동시에,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행하고 계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에벤에셀’ 역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그 말의 의미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고백을 자신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말로만 하는 고백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속에서 겪었던 고생과 고통들과 많은 실패들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고생과 고통을 ‘100보 전진을 위한 50보 후퇴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식으로

성공을 주기 위해서 실패를 겪게 했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만약 과거의 고생이 지금 현재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기 위해서 패배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처음 블레셋과 전투할 때,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생각은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들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니 승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음과 무지에서 그들을 벗어나게 하시기 위해, 

전투에서 패배하게 하시고 오랜 세월을 고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범죄가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때 승리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음을 알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도록 하기 위해 도우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여러분, 여기까지의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돌아보면 고생과 위기가 있을 때마다, 여러분의 수고와 노력과 땀으로써 모든 것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신뢰하는 세상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셨다면 내가 왜 그런 고생을 했어야 하느냐?’라는 생각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 놓기 위해 여러분을 도우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패배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실패와 고난과 고통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로 하면 되지, 꼭 그렇게 고생시켜야 하는가?’라는 불만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완악함을 깨닫지 못한 생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곧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의지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바라볼 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데, 

이러한 인간의 완악함을 무엇으로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 쓰러뜨린 것처럼, 

우리가 힘으로 여기고 있는 것을 쳐서 우리를 쓰러뜨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일 속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인간의 일 말고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일에 몰두하게 되면, 결국 자신의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일, 곧 블레셋에게서 승리하기 위해 언약궤를 가져와 도움을 구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일을 돕기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일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패배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실패하게도 하시고 고통에 있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별 탈 없이 잘사는 것을 두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그것 역시 하나님이 도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잘살게 하기 위해 도우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세우기 위해 도우시는 과정에서 주어진 것들로 여기셔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가진 것으로 교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잘사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면, 

힘들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는 것이란 뜻입니까? 

이것이 곧 블레셋에 패배할 당시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은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돕는다는 말입니까? 바로 여러분의 신앙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도우시는 것입니다. 

이 도우심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기념으로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돌이 앞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신 일에 대한 증거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하나님이 여기까지 여러분을 도우셨음을 인정한다면, 사무엘처럼 기념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돌을 하나 가져다가 세워야 합니까? 이왕이면 흔한 돌말고 이태리 수입석을 가져다가 예배당에 세워놓을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26:22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언할 때 했던 말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 자리에 서서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되어진 일임을 말합니다. 

곧 바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물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신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곧 오늘 본문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도 바울 자신이 에벤에셀이라는 기념비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모든 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인 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곧 그리스도인 된 여러분 자신이 에벤에셀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여기가지 도우셨다’는 것을 외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5-17절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잊지 않도록 힘썼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희생이 보여주는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멸망에 처해야 할 우리를 도우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안에 살아가도록

저와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기까지 여러분을 도우신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그 도우심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에벤에셀 돌이 되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증거하는 증거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볼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증거물이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만 보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https://youtu.be/tPWBrfXAU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