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曠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5연 15행의 자유시이다. 작자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그 뒤 시집에 계속 실려 이육사의 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육사시비(陸史詩碑: 안동댐 입구에
세워져 있음)에도 새겨져 있다.
시적 구성은 과거(1∼3연)·현재(4연)·미래(5연)와 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 단계로 배열되어 있다.
먼저 과거는 1∼3연까지로, 광야의 형성 과정을 태초에서부터 순차적으로 그 발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흰 눈으로 덮인 암담한 현실적 상황을 극복하고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나타냈고,
미래는 먼 뒷날 반드시 이 광야에 초인(超人)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는 까마득한 태초로부터 천고(千古)의 뒤까지 많은 시간이 압축되어 있다.
이런 시간 관념과 마찬가지로, 이 시는 공간 의식도 무한히 확대되어 있다.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고 한 것과 같이
끝없이 넓은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시간적인 무한성과 공간적인 광막함이 이육사의 시로 하여금 남성적이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간 의식과 공간 의식의 확대는 이육사가 중국 대륙을 내왕하는 동안에 얻어진 체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인지 모른다.
태초 이래로 ‘끊임없는 광음(光陰)’이 스쳐간 시간의 발자취와 모든 산맥들도 범하지 못한
광고(曠古)하고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원형 그대로의 광야인 것이다.
이 시의 핵심은 4연과 5연에 집약되어 있다.
비록 가난하지만, 시인이 소망하는 ‘노래의 씨’를 뿌려,
그것을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으로 하여금 부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삶을 거부하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매화향기’가 있고,
언제인가는 피어날 ‘노래의 씨’가 있어, 그것을 불러줄 초인이 올 때 비로소
우리의 진정한 삶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