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여행

목포의 눈물 - 이난영

여풍2 2019. 2. 19. 15:53


    



이난영 李蘭影

1916년 목포시 양동에서 이남순(李南順)의 장녀로 태어났다.
목포공립보통학교

(현 목포북교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도에 자퇴했다.
엄마와 함께 제주도의 생활이 시작되고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의 아이를 돌보면서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를 높이 평가하게 된 집주인이
그녀를 소위 막간가수(영화나 연극이 시작 되기전 나와 노래하는 가수)로 활동하게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삼천리 가극단장의 권유로
특별단원으로 채용된 것이 1932년 열여섯살 되던 해였다.


이후 우연히 OK레코드 이철 사장의 눈에 띄어
작곡가 손목인에게 소개되어 목포출신 문일석 작사인[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된 것이 드디어 노래의 여왕 이난영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 특유의

 목소리와 우리의 한(恨이)서린 가사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1933년 11월 <불사조> <고적(孤寂)>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
1934년 1월 신민요조의 노래 <신강남>과 <밤 언덕엘 넘어서> 발표.


1934년 2월 <봄맞이>로 정상급 가수로 부상함.
1934년 일본 동경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 한국인 대표 출연.


1934년 <비오는 여름밤><녹스른 거문고>취입. 고복수와 함께 <젊은 뱃사공>발표.
1935년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목포의 눈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음.


1940년 2월 <울어라 문풍지>, <흘겨본 과거몽>발표
1940년 7월 박시춘 곡 <선부(船夫)의 아내>, 이봉룡 작곡 <목포는 항구다> 대히트.


1946년 12월 남편 김해송과 뮤지컬 전문쇼단 KPK악극단 창단 활동.

 
1950년 6?25전란 때 남편 김해송 납북.
1962년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감. 1년 정도 생활하다 귀국.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장례식.


1969년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 건립
1986년 10월 1일 사후21년 만에 목포시 '시민의 상(교육문화부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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