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과 취미

황병기 - 범아시아적 음악을 꿈꾼 국악인

여풍2 2018. 10. 3. 12:05

범아시아적 음악을 꿈꾼 국악인

황병기

고교 시절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수상하면서 가야금에 두각을 나타냈던 황병기 선생. 그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대 음악대학 강의, 명동극장 지배인, 화학 회사의 기획관리, 출판사 사장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도 매일 가야금을 연주했다. 가야금은 그에게 평생의 반려자였기 때문이다. 정악과 산조를 함께 공부한 그는 옛것만 굳어지는 것은 전통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1962년 현대 가야금 곡인 ‘숲’을 발표했다. 1974년부터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에만 매달렸던 황병기 선생은 현대 국악을 개척하면서 민족적 경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걸어온 길과 그의 리더십을 만나보자. *황병기 선생은 2018년 1월 31일 폐렴으로 별세하였습니다. 향년 83세. 이 인터뷰는 별세 3년여 전인 2014년 11월에 진행된 것임을 밝혀둡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단길(Silk Road) - 가야금 황병기, 장구 김웅식, 국립국악원 2015

비단길(1977)은 작곡자의 설명에 의하면 “신라 고분에서 발견되는 페르시아 유리그릇의 신비로운 빛에서 작곡 동기를 얻었는데, 그 악곡명은 고대 동서 문물이 교역되던 통로의 이름이면서 신라적인 환상이 아득한 서역에까지 펼쳐지는 비단같이 아름다운 정신적인 길을 상징하기도 한다”고 한다. 제1장은 미묘하게 변화해 가는 리듬을 타고 환희와 슬픔이 얼룩진 신비로운 선율로 되어 있다. 제2장은 빠른 4박자의 리듬에 의한 선율이 차츰 높은 음역으로 고조되어 격정적인 화음과 리듬에 의하여 절정을 이루면서 끝난다. 제3장은 화음으로 장식된 고요한 선율로 되었는데, 중간에 북소리와도 같은 저음부의 리듬이 출현하여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끝으로 제4장은 새로운 주법으로 연주되는 특이한 고음의 분산 속에 음산한 저음이 네 번 울리고 이어서 저음군이 폭풍처럼 휘몰아 치다가 그치면 종소리를 연상시키는 화음이 네 번 울리고 제1장의 주제 선율이 재현되면서 전곡이 끝난다.

Q. 선생님의 유년시절이 궁금합니다. 어떠한 배경에서 성장하셨나요?

저는 서울의 가회동, 지금 북촌이라고 하는 데서 태어났어요. 북촌 꼭대기에 중앙중학교가 있었는데 바로 그 옆에 살았죠. 그 이래로 지금 80이 가까워질 때까지 서울에서만 살았습니다. 제가 ‘자랑스러운 서울인’으로 두 번을 뽑혔지만 지금 서울의 중심인 강남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그러니까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늙어 가고 있지만 서울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죠.

Q. 고등학교 때 책을 좋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책 읽는 걸 아주 좋아했어요. 그 당시에 서점에 가면 내가 안 읽은 어린이 책이 없을 정도였어요. 늘 언제 새로운 책이 나오나 고대했었죠. 그래도 어린이 책은 잘 안 나오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어른 책을 읽었는데, 처음에 어른 소설을 읽고 굉장히 실망했어요. 어른들 소설은 우리 주위의 얘기, 우리 옆집 얘기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 당시 제 아저씨한테 “아니, 어린이 책은 기상천외한 얘기들이 많아서 재밌는데 어른들 책은 왜 이렇게 일상적인 얘기만 있습니까, 그래서 재미없어서 못 읽겠습니다”라고 했었죠.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웃으면서 “야, 그러니까 재미있지. 있지도 않은 기상천외한 얘기 읽는 게 뭐가 재밌냐?” 그러시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까 그럴 법하기도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하고 그러던 기억이 나요. ▶외당숙 김소열 아저씨와 1949년 경기중 1학년 때 찍은 사진. 어린 황병기에게 많은 조언을 해준 분이다.

조금 지나 <임꺽정>이 을유문화사에서 나왔는데 한꺼번에 나오지 않고 띄엄띄엄 나왔어요. 그래서 한 권 다 읽고 나서 그 다음 권이 언제 나오나 고대하면서 나오자마자 또 읽고 그런 식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그만큼 내가 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책이 참 드물 때예요. 가난하던 시절이죠. 그래서 그때 내가 읽던 <임꺽정> 책을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한국전쟁 전 책이니까 지금은 거의 고서처럼 됐지요.

Q. 아버님,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우리 황씨네는 손이 귀했어요. 손이 귀하다는 것은 남자가 귀하다는 뜻이죠. 여자는 족보에 오르지 않던 시대니까요. 우리 아버지가 2대 독자였어요. 그래서 대를 잇는 것이 중요했는데 어머니가 시집오셔서 딸부터 하나 낳고 16년간 전혀 어린아이를 안 낳았어요. 그러다 제가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저하고 누나하고는 16년 차이가 있었죠. 어머니 같은 누나였습니다. 지금 다 돌아가셨지만요. ◀1945년 국민학교 3학년 때 집에서 애견과 함께 찍은 사진. 어머니가 동물을 기르는 일을 좋아하셔서 항상 집에는 개가 여러 마리 있었다.

아버지는 평생 사업을 하셨어요. 사업가는 돈을 많이 벌 때는 엄청나게 벌고 또 망할 때는 아주 망해버리는 특성이 있죠.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 집은 풍요와 빈곤을 오갔습니다. 번듯한 집에서 살았는가 하면 집에 있는 숟가락 한 개까지 모두 사라진 적도 있었어요. 어머니는 사람을 좋아하던 분이셨어요. 친척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동물을 기르는 일을 좋아하셔서 우리 집에는 항상 개가 여러 마리 있었어요. 그리고 내가 공부 잘하는 것보다 몸 건강한 것을 중요시하셨죠. 그래서 우등상을 타다가 보여드리면 별로 좋아하지 않고 개근상을 타다 드리면 아주 좋아하셨어요. 항상 무엇보다도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아주 성격이 밝은 분이셨죠.

Q. 처음 가야금을 보신 건 언제신가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굉장히 잘했어요. 노래를 잘 불러서 독창자로 뽑히기도 하고 KBS에 출연했던 기억도 나요. 중학교에 올라오면서 ‘악기를 하나 제대로 배워야겠다’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어요. 그런데 시작을 못하고 있었지요. 그때는 저희가 악기를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돈이 없었죠.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나서 부산에 피난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였던 1951년 중학교 3학년 때 친구였던 홍성화가 “너, 가야금 배워보지 않을래?”라고 권해서 방과 후에 제가 다니던 경기중학교 근처 고전무용연구소에 갔습니다. 그 연구소에 가야금 하시는 분이 세 들어 살아서 그분을 만나게 됐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가야금이라는 악기도 구경하고 소리도 들었죠. 처음 가야금 소리를 듣자마자 ‘아, 나는 가야금은 꼭 배워야겠다, 정말 좋구나’ 그러던 생각이 납니다. 역사 시간에 가야금에 대해서 배우긴 했죠. 그저 삼국시대에 있다가 소실된 악기인 줄 알았어요. 전설 속의 악기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1944년 국민학교 2학년 때의 황병기 선생. 어릴 때 노래를 잘해 독창자로 뽑히기도 하고 KBS에 출연하기도 했다.

Q. 처음 들었던 가야금 소리가 어떠셨나요?

소리가 좋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죠. 예를 들어 ‘장미꽃이 아름답다’ 그럴 때 뭐가 아름다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가야금 소리를 처음 듣는 순간 너무 매혹적이었어요. 그래서 ‘저 악기는 내가 살면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그뿐 아니라 가야금 소리 속에 우리 옛 어른들의 목소리와 메시지가 있는 것 같았어요. ‘여기 우리 것이 있다, 너 지금 무엇을 방황하느냐’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느낌이었습니다.

Q. 어머니가 가야금을 처음 사주셨을 때 느낌이 어떠셨나요.

제가 가야금을 무작정 배우기 시작하려고 하니까 저희 어머니, 아버지가 반대를 하셨어요. 그렇지만 제가 워낙 배우려는 의지가 크니까 막지 못하셨죠. “네가 정 하고 싶으면 해라. 네 인생은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가야금 배우는 게 기정사실이 되고 난 후, 우리가 당시 부산에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전라북도 전주까지 가서 가야금을 사다 주셨어요. 전주가 예향이라 악기 만드는 곳이 있었거든요. 처음 내 가야금을 받고서 마치 애인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가야금 받은 첫날밤에 마치 신부처럼 벽에다 세워 놓고 자다가 일어나서 불 켜고 쳐다보고, 그렇게 사랑스럽던 기억이 나요.

Q. 가야금은 어떻게 배우셨나요.

저는 그 후부터 가야금을 국립국악원에서 배웠어요. 처음에는 상층사회 음악이었던 ‘정악’을 배웠죠. 그 다음에는 민속 음악의 중심인 가야금 산조를 산조 전문가한테 배웠습니다. 윗세대들은 정악이면 정악만 하고, 산조면 산조만 했죠. 정악도 하고 산조도 하는 연주가는 없었어요. 그런데 저는 양쪽을 다 전문가들한테 배운 최초의 세대입니다.

1957년 KBS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한 황병기 선생(앞줄 왼쪽)과 스승 김윤덕 선생(앞줄 가운데). 당시 황병기 선생은 경기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Q.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셨는데 서울대 법대를 가신 것은 의외입니다.

제가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국 국악 콩쿠르에 나가서 1등을 했어요. 그리고서 음악대학이 아니라 서울대 법과대학을 갔지요. 요즘 사람들은 그게 참 이상하다고 물어봅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게 당연했던 것이, 가야금을 배우는 건 그냥 좋아서 배우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학교 전공은 또 전공대로 따로 있는 것이고요. 음악을 생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어요. 뿐만 아니라 그때 내가 음악대학을 가려 했어도 그 당시에는 전국 대학에 국악과라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당시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 법대에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거기서 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 오면 지금 비원 앞에 내립니다. 비원 앞에 바로 국악원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가야금을 배웠어요. 그 길 건너편에 지금 현대그룹 사옥 자리가 저희 집 자리예요. 국악원에서 걸어서 우리 집까지 1~2분이면 오죠. 그걸 매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학을 다닐 때도 가야금은 매일 했지요. 대학교 3학년 때 또 KBS 주최 전국 콩쿠르가 있었어요. 거기에 나가서 또 1등을 했어요. 그러면서 음악계에 이름이 알려진 거라고 생각합니다.

Q. 법대 진학이 현재에 도움이 되셨는지요.

법과대학에 김증한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1학년 때 김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법과대학에 온 것은 법조문을 알려고 온 게 아니다. 법조문은 육법전서만 읽으면 다 아는 거고 법학적 사고방식, 그것을 배우려고 온 것이다. 또 그것을 알아야 된다.” 그 말씀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또 헌법을 가르치던 한태연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분 강의 중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법이 먼저냐, 권력이 먼저냐. 권력은 법이 없이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법은 그냥 종이 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법이 먼저냐, 권력이 먼저냐’에 대한 결론은 ‘모른다’는 거예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인 것처럼. 또 황산덕이라는 교수님도 계셨어요. 그분이 법철학 시간에 또 말씀하셨습니다. “법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이 법의 목적이다. 그러나 그런 이상적인 사회는 집단으로 갈 수는 없는 것이고 각 개인이 비약해서 가야 되는데 그 날개가 종교다.” 돌이켜보니 이런 저런 강의 생각이 많이 납니다. 저는 법대에 다니면서 법학적 사고방식과 사물을 깊이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제가 음악가로 성장할 때에도 많은 영향을 줬어요. 그래서 저는 음악 중에서도 음악 미학에 취미가 있어서 미학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죠. 그게 다 법과 대학 다닌 때문이에요.

1958년 서울 법대 재학 시절 동숭동 마로니에 광장에서 열린 서울대 축제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 당시에는 가야금을 배우는 것은 그저 좋아서 배우는 것이고 대학교 전공은 전공대로 따로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때도 매일 가야금은 연주했다. 그렇게 가야금은 매일 하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Q. 23세부터 국악과에서 강의를 하셨습니다. 강단에 처음 서신 때이지요.

제가 1959년 스물세 살 때 법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해에 우리나라 최초로 국악과가 생긴 겁니다. 그게 바로 서울대학교 국악과지요. 그 당시에 학장 선생님이 현제명이라는 유명한 작곡가였는데 그분이 개인적으로 저를 불러서 “너 법대를 졸업하면 반드시 음악대학에 가야금 강사로 나와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서울대 국악과에 강사로 나가기 시작했죠. 강의할 때 저는 ‘4년만 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4년은 가르쳐야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을 하게 될 테고 그러면 저는 하나의 결실을 얻는 것이니까요. 실제로 저는 1959년 강사를 시작해서 1963년에 서울대를 그만뒀습니다.

그 이후는 저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여러 가지 일을 했어요. 그 당시에 명동극장이라는 영화관이 있었어요. 거기 지배인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 상당히 큰 화학 회사의 기획·관리 업무도 해봤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보림영화사와 출판사인 문조사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닮아서 사업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세월이 흘러갔지요. 그러나 무엇을 하든 가야금은 매일 했어요. 가야금은 좋아서 항상 하는 거니까요.

Q. 첫 작품 <숲>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숲>은 1962년에 작곡을 했습니다. 제가 서울대 음대 강사로 일하던 시기죠. 그 당시에 저는 ‘미술이나 문학, 특히 시 쪽에서는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작품이 계속 나오는데 우리 음악은 왜 전통 음악만 연주를 하나’ 생각을 했습니다. 음악에서도 새로운 작품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었죠. 전통이라는 것은 새로운 작품이 나오면서 이어지는 것이죠.

즉, 통(統)을 전(傳)해 내려가는 것이지,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고 그냥 옛것만 굳어진 채로 좋아한다면 그것은 전통이라기보다 골동품이지요. 그래서 음악에서도 새로운 작품이 나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1962년에 곡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 처음 나온 가야금 곡이 <숲>이에요. 그래서 그 곡은 저의 첫 가야금 곡일 뿐 아니라 우리 음악 사상 최초의 현대 가야금 곡이기도 합니다.

Q. 이화여대에 가시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투신하셨습니다.

1974년 이화여자대학교에 한국음악과가 생겼습니다. 그 당시 총장이 김옥길 씨였는데 김옥길 씨가 불러서 면담을 했죠. 이화여대에 한국음악과가 생겼으니 아예 교수로 들어오고 과장도 맡아달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심사숙고 끝에 ‘이제 음악만 해야겠다,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야금만 한다’ 그런 프로의식을 그때 가진 거예요. 제 나이가 38세 때죠.

Q. 소설가 한말숙 씨와 결혼하셨습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우리 집사람하고 제가 결혼한 것이 1962년이었어요. 제가 스물일곱 살 때죠. 그때 집사람도 데뷔해서 소설가로 이름을 날릴 때입니다. 저희가 서로 안 지는 오래됐어요. 집사람은 서울대 언어학과를 다녔는데 국립국악원으로 가야금을 배우러 왔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둘이 같은 선생님께 가야금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만나서 사귀다가 “같이 살자” 그래서 결혼을 했어요. 집사람이 저보다 다섯 살 연상이에요. 그래서 그때는 좀 좋지 않은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저희 부모님들은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쉽게 결혼을 했죠. 제가 3대 독자인데 집사람은 이 집에 들어와서 아들 둘을 낳았어요. 큰아들은 수학자고 작은아들은 물리학자예요. 재작년에는 우리가 금혼식을 했죠. 둘이 가끔 싸울 때도 있지만 오래 살다보니까 지금은 같이 늙어 가고 있는 거예요. 예전에 주례 서는 사람들이 신랑 신부를 보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하라”는 말을 많이들 했는데 우리 부부야말로 이럭저럭 살다 보니까 해로가 됐지요. 그러다 보면 이제 죽을 날이 오겠지요. 그러면 죽으면 되겠지요. (웃음) ▲1962년 결혼식 사진. 주례는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 황병기 선생은 “부부 간에는 일심동체가 되면 큰일 난다고 생각한다. 서로 인격을 존중하면서 의무를 다하고 약간 떨어져서 사는 것이 건전한 부부생활을 하는 데 좋다”고 말한다.

1988년 찍은 가족사진.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 반대로 장녀 혜경, 황병기 선생, 부인 한말숙 선생, 차남 원묵, 장남 준묵, 차녀 수경. 장남 황준묵 씨는 유명한 수학자로 고등과학원 교수다.

Q. 대장암 수술을 하고 나서 <시계탑>이라는 곡을 쓰셨습니다.

1999년에 제가 대장암 진단을 받았는데 대장암은 수술을 서둘러야 돼요. 그래서 빨리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대장암 수술을 받다가 죽는 사람이 꽤 돼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전제 하에 수술 준비를 했어요. 수술이 끝나고 나니까 링거 병을 매단 차를 밀면서 병원 복도를 돌아다니며 운동을 하라고 해요. 그래서 참 비참한 상태가 됐죠. 그런데 입원실에서 남쪽으로 난 창밖을 보니까 서울대학병원의 상징인 시계탑이 보이더라고요. 고종 황제 때 지은 근대 건물이죠. 밤에 조명을 비추면 입원실에서 바라보기 참 아름답더라고요. 평소에는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그땐 꼭 다른 세계를 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내가 지금은 비참하고 억울하지만 곡을 하나 써야겠다’라고 마음을 먹게 됐는데 내가 비참한 상태에 달하니까 거꾸로 아주 아름다운 곡을 쓰고 싶었습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곡을 말입니다.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그중에서도 마지막 악장을 떠올렸습니다. 그렇게 병원에 있을 때 <시계탑>이라는 곡을 구상하기 시작했죠. 퇴원하자마자 병원에서 구상했던 악상을 다듬어서 바로 곡을 썼어요. 그 이후에도 의사가 하고 싶은 일은 뭐든 다 하라고 하더군요. 1월에 퇴원해 3월에 독주회를 했고, 5월에는 독일로 공연도 갔어요. 기저귀를 차고 다니면서 다 해냈죠.

Q. 이화여대에서 오래 강의하셨습니다.

이화여자대학에 참 오래 있었죠. 38세 때 처음으로 전임교수로 들어가서 65세 정년퇴직 때까지 있었으니까요. 제 강의가 상당히 인기가 있었어요. 저는 강의를 할 때 ‘나중에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넣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하지 않았어요. ‘강의 듣는 그 시간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그렇게 노력을 했어요. 대학 시절은 인생의 절정기 아니에요? 배우는 것 자체가 즐거워야지, 앞으로 써먹기 위한 지식 습득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국악과장으로 있으면서는 학생들 음악회를 매년 했어요. 정기 연주회는 학생들이 행복할 수 있는 축제여야 되겠다 생각해서 그런 방향으로 제가 운영을 했죠. 예를 들자면 학년별로 떡 한 시루씩 쪄오라 그랬어요. 연주회가 끝나면 연주회장 앞에 있는 풀밭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관객들, 연주했던 학생들이 서로 얘기하고 떡 먹고 음료 마시면서 ‘아, 오늘 참 행복한 날이었다. 우리는 축제를 치렀다’는 생각이 들도록 제가 유도를 했죠.

Q. 1990년에 평양에 다녀오셨습니다.

윤이상 선생은 1990년 평양 통일음악회에 황병기 선생을 초청했다. 이 음악회를 계기로 남북 음악가들은 이듬해부터 함께 ‘한겨레음악회’를 열었다. 1993년 도쿄 한겨레음악회 때 메트로폴리탄 호텔에서 만난 윤이상 선생(왼쪽에서 두 번째)과 황병기 선생(오른쪽에서 두 번째).

윤이상 선생과의 인연 덕분이죠. 1974년에 네덜란드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세계 음악 심포지엄에 그와 내가 한국 대표 작곡가로 참석한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함께 지냈는데 한국을 그리워하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그 후 1980년대 초 독일에서 현대음악제가 열렸을 때도 만났습니다. 이 두 번의 인연으로 윤 선생이 평양에서 열리는 통일음악회의 초청장을 보내왔습니다. 남한뿐 아니라 중국ㆍ일본ㆍ미국과 중앙아시아ㆍ유럽 국가 등 세계 각국에 있는 한민족 음악인을 초청해 음악제를 여는데 윤이상 선생이 준비위원장 자격으로 초청장을 보낸 것이었지요. 초청장을 받고 방북단을 구성했어요. 여창 가곡 김월화, 판소리 오정숙, 서도소리 오복녀 등 인간문화재들을 주축으로 해서 김덕수 사물놀이패까지, 모두 14명의 음악인, 여기에 신문기자 세 명을 더해서 ‘서울전통음악연주단’을 결성했지요. 남북 합의로 북한을 방문한 첫 민간인이었습니다. 또 반대로 평양 공연 두 달 뒤에는 북한의 ‘평양민족음악단’을 서울로 초청해 ‘90 송년통일음악회’를 열기도 했지요. 공교롭게도 둘째딸 결혼식 날 이들이 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나는 딸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이들을 배웅하러 판문점으로 갔습니다. 남북 음악 교류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죠.

Q. 백남준 선생과의 인연도 깊으신데요.

1995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백남준 선생과 함께. 백남준 선생의 누나가 황병기 선생에게 가야금을 배우는 것을 계기로 친분을 쌓게 됐다. 1968년 미국 뉴욕에서 만난 후 백남준 선생의 연주회에 찬조 출연을 하면서 교분을 쌓았다. 2006년 백남준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백남준문화재단이 생겼고 황 선생은 재단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백남준 선생은 제 고등학교 4년 선배예요. 다들 아시는 것처럼 오늘날 IT 시대를 예고한 사상가이자 아티스트죠. 저는 1960년대에 세계 음악계의 동향을 일본에서 발행하는 음악 전문 잡지 <음악 예술>에서 익혔어요. 그 잡지를 정기 구독했는데 당시에 최첨단을 걷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대개 백남준 씨의 이야기였어요. 백남준 씨 사진, 백남준 씨의 기고 글이 나왔죠. 그래서 제가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군가 궁금해하던 차에 백남준 씨 누나가 저한테 가야금을 배우게 됐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백남준 씨 누님이 “너 백남준이라는 사람을 아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이름은 안다”고 했죠. 일본 잡지를 보고 알았다고 했어요. 누님이 사실 자기 동생이라고 전화번호를 알려줄 테니까 미국 뉴욕에 가거든 전화해서 만나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 후에 뉴욕에 갈 일이 있어서 전화를 걸었더니 백남준 씨가 굉장히 반가워하면서 “지금 만나자”고 그러더라고요. 내일, 모레가 아니라 지금 만나자는 거예요. 전화를 끊고 백남준 씨를 찾아갔던 게 1968년도예요. 늦은 오후에 그의 집을 찾았는데 다세대 주택에 가까운 아파트였습니다. 2층에 들어가 문을 두드렸더니 그가 나왔습니다. 방은 쓰레기통이었어요. 책, 마네킹 부서진 것, 분해된 TV, 드럼통 등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에서 백남준 씨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을 때예요. 백남준 씨가 36세, 제가 32세 때였죠. 만나자마자 굉장히 친해졌어요.

함께 공연도 했는데, 백남준 씨 연주회에 제가 찬조 출연을 하면서 교분을 쌓게 됐죠. 1968년 뉴욕 타운홀에서 백남준-샬럿 무어만과 함께한 ‘재판 기금 모금 퍼포먼스’도 기억납니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옷을 모두 벗은 무어만이 공연을 하다가 경범죄로 처벌받았죠. 뉴욕 경찰을 상대로 낸 소송에 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열었던 공연이었습니다. 백남준 씨는 저에게 찬조 출연을 부탁했고 저는 흔쾌히 수락했죠. 그와 함께한 첫 공연이었습니다. 제가 그를 통해서 현대 예술에 대해 배운 게 참 많습니다. 백남준 씨는 2006년에 돌아가셨죠. 그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2년 전쯤에 정독도서관, 옛날 경기고등학교 자리에 백남준문화재단이 생겼습니다. 제가 재단 이사장으로 지금 일을 하고 있습니다.

1991년 7월 북아현동 자택에서 폴란드 작곡가 펜데레츠키 부부와. 그는 <미궁>에서 함께 작업한 현대무용가 홍신자 씨, 존 케이지, 윤이상 선생, 백건우 선생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94년 10월 자택에서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과 우리 전통 음악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Q. 그 외에도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가 있으셨지요.

1950년대부터 저는 서양 음악뿐 아니라 미술, 무용 등 현대 예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 당시에도 현대 미술전은 꼭 관람하고 화집으로 유명한 스키라 출판사의 현대 미술 전집을 구입하기도 했어요. 인도 음악에도 관심이 많고 재즈도 좋아하죠. 관심사가 다양한 만큼 친구도 다양합니다. 저는 <미궁>에서 함께 작업한 현대무용가 홍신자 씨, 존 케이지, 윤이상 선생, 백건우 선생 등 다양한 분야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해 왔죠. 그중에 장한나 씨는 46년 연하의 친구입니다. 어릴 때부터 제 음악을 들었다고 하죠. 2001년 여름 제가 한 잡지사의 릴레이 인터뷰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한나 씨를 지목했습니다. 그때 한나 씨가 연주를 위해 내한했을 때여서 처음 만나게 됐죠. 2003년 하와이에서 열린 신년 연주회에서는 제가 전반부에, 한나 씨가 후반부에 연주했습니다. 그때 5일간 저희 부부와 한나 씨, 그리고 한나 씨 부모님은 같은 호텔에서 지내며 같은 차를 타고 연주 홀에 다니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죠. 2005년 베를린 필 신포니에타와 협연할 때는 잠시 틈을 내 제게 가야금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8월 18일과 20일에 하루걸러 공연이 있었는데 그 사이인 19일에 가야금을 배운 것이죠. 2008년에는 한나 씨가 제 가야금 합주곡 <새봄>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Q.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으로도 오래 일을 하셨습니다.

제가 2006년부터 2011년까지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했었죠. 제가 감독이 되고 나서 ‘우리 악단은 국립이기 때문에 두 가지를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하나는 국립이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할 수 없는 아주 새롭고 예술적인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다른 하나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세금으로 운영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국민에 대해서 봉사를 해야 된다, 국민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술적이면서 실험적인 음악 공연들을 하면서 동시에 아주 대중적인 공연, 이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국립 단체로서의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단원들을 만나면 그만둔 지 3년이 됐는데 그때 추억이 참 좋았다고 얘기를 합니다. 또 제가 맡았던 6년간 국립국악관현악단이 한국 최고의 국악관현악단이 됐다 그렇게 높이 평가해주는 분들도 있어서 참 흐뭇합니다.

Q. 연주회를 많이 하셨는데요. 기억에 남는 연주회를 꼽으신다면요.

기억에 남는 연주회는 하나둘이 아니죠. 그래도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1965년도 제가 29세 때 최초로 미국 공연을 했어요. 처음에 하와이에서 열린 ‘20세기 음악 예술제’에 참가했는데 거기서 평이 좋았어요. 한국에서도 가야금 연주회가 별로 없었던 때였는데 외국에서 초청을 받아서 매우 기뻤죠. 1965년도에 하와이에서 녹음한 제 첫 번째 음반이 나왔죠. 그 음반 타이틀이 ‘한국 가야금 연주, 황병기(Music from Korea the Gayageum. played by Byeonggi Hwang)’예요. 그때는 LP시대라 LP로 제 음반이 나왔죠. 당시 ‘하이파이 스테레오 리뷰’라는 미국의 음반 비평 전문잡지에서는 별 다섯 개 만점을 주고 “하이 스피드 시대에 현대인에게 정신적인 해독제”라는 표현을 쓰며 극찬해주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에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등 미 서부 지역 큰 도시에서 독주회를 열고 방송을 하던 기억이 나요. 그때만 해도 외국에 나가는 게 무척 어렵던 시절이에요. 우리가 무척이나 가난했으니까요. 또 하나 기억나는 건, 1974년 이화여대 교수로 들어가던 해였는데 그해에 유럽 최초의 순회공연을 했어요. 네덜란드부터 시작했죠. 암스테르담, 쾰른, 베를린, 뮌헨, 빈, 베니스, 제네바, 파리 등 8개 도시에서 연주했습니다. 파리 연주회에 학교 다닐 적에 탐독하던 소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왔었어요. 제가 무척이나 감동을 받았죠. 게오르규가 무대 뒤까지 와서 칭찬해주고 격려해줬습니다. 1986년에는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열었고 1990년에는 평양에서도 가야금을 연주했죠.

Q. 선생님의 음악은 민족적인 경계를 넘었다고 평가받습니다.

나는 세계적인 곡을 써야겠다는 것보다는 범아시아적인, 아시아 전체의 음악이 될 수 있는 그런 곡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했어요. 그 생각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최초의 작품이 <침향무>입니다. 그리고 <비단길>이라는 작품이 있고, 최근에는 <하마단>이라는 곡이 있어요. 1974년 제가 최초로 유럽 공연에 갔을 때 네덜란드에서 아시아 음악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거기에서 제 음악을 “이건 아시아적인 음악이다, 딱 한국 음악이라고 할 수 없다”는 평가를 하더라고요. 그 평을 받고서 제가 무척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Q. 선생님께 음악은 어떤 존재입니까?

지난해 <논어 백가락>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논어>에 내가 좋아하는 문장 100개를 골라서 해설을 붙여 놓은 책이에요. 저는 <논어>를 참 좋아하는데 논어를 보면 공자가 “사람은 음악에서 완성되는 것이다”라고 말해요. 음악은 자연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거예요. 가령 피아노 소리나 가야금 소리나 피리 소리는 자연에는 없는 겁니다. 사람이 만든 거죠. 그래서 가야금의 ‘뚱’ 하는 소리가 이 자연 속에는 없는 거예요.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리니까요. 그렇게 아름다움의 극치에 달하는 것이 바로 음악이죠. 저는 그런 음악을 좋아합니다. 음악의 기능 중에는 인간의 영혼을 쓰다듬는 기능이 있죠. 저는 음악의 오락적인 기능보다는 우리 영혼을 쓰다듬는 쪽에 더 중점을 두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 음악은 대부분 그렇게 명상적인 곡이죠.

Q. 선생님 곡 중에 대표곡은 <침향무>인가요.

사실은 내가 제일 아끼는 곡이 <침향무>가 아니에요. 대중들이 내 곡 중에서 <침향무>를 제일 좋아해서 연주해달라는 요청이 많은 거죠. 한국 전통 음악은 거의 조선시대 음악이에요. 그중에서도 조선 말기죠. 전 조선의 틀을 부수고 싶었습니다. 원류를 찾다가 신라로 거슬러 올라갔고, 신라의 무용가로부터 위촉받았다는 생각으로 쓴 곡이 <침향무>죠. 1974년의 일입니다. 침향무는 침향이 서린 속에서 추는 춤이라는 뜻의 곡이에요. 신라 불상들이 춤추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썼죠. 조선조의 전통 음악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곡이라선지 국내뿐 아니라 해외서도 인기를 얻었어요. <침향무>를 쓴 다음에 경주 황남대총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페르시아 유리잔을 보게 됐어요. 그 유리잔에서 모티브를 얻어 쓴 곡이 <비단길>입니다. 이후 이란 테헤란에 아직 남아 있는 페르시아의 도시 이름이자 승려 시인의 시 ‘하마단’을 읽고 만든 곡이 2000년에 쓴 <하마단>이지요. 작곡가 입장에서 내 곡은 자식 같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어요. 자식들도 다 팔자가 다르듯이 곡마다 다 팔자가 있는 것 같아요. <침향무>는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팔자를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침향무>가 제 대표곡인 것처럼 돼 있죠.

                                                            침향무(沈香舞) - 가야금 황병기, 코아트 2011


Q. 이 시대의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좀 실망스러우시겠지만, 기억이 안 됐으면 좋겠어요. 나는 이제 죽겠죠. 그러면 그걸로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유언에 제 무덤이나 비석이나 이런 걸 일체 만들지 말라고 했어요. 그냥 저 살 때까지 열심히 살면 됐지요. 죽음 다음에까지 기억되고 그러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Q. 인생에 가장 지키고 싶은 삶의 원칙을 말씀해주신다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첫 문장이죠.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열심히가 아니라 때때로라는 겁니다. 즉 네가 하고 싶을 때 하라는 말이죠. 이 말을 다시 풀어서 하면 “네가 하고 싶은 때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이겠죠. 저도 평생 가야금을 이렇게 때때로 익혔습니다. 또 “멀리서 친구가 있어서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남이 나를 몰라줘도 내가 노여워하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 저는 그 말을 아주 좋아합니다.

Q.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하신다면.

무엇을 하든지 잘하고 싶겠지요. 그런데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좋아하는 거예요. 즐겨야 돼요. 그래서 자신이 진짜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이 뭔가. 인생에서 그것부터 찾아야 돼요. 진짜 좋아하고 즐기는 일을 찾으면 그건 틀림없이 잘하게 되고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든지 좋아하고 즐기면서 해라. 그것이 제 후배들에게 주는 답변입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립무용단의 춤사위에 맞춰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는 황병기 선생.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은 2007년 연하장에 이 사진을 썼다.

 

황병기

1936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서울대 음악대학에서 강의하던 1962년 최초의 현대 가야금 곡인 <숲>을 썼다. 명동극장 지배인, 출판사 사장 등 다양한 일을 하다가 1974년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본격적으로 음악에만 매달렸다. <침향무>, <미궁>, <비단길>, <춘설>, <달하 노피곰> 등 다양한 앨범을 발표했다. 196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국악을 공연했고 1974년에는 유럽 최초의 순회공연을 했다. 2006년부터는 6년간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으로 일했다. 2002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고, 2003년 호암상, 200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2010년 후쿠오카 아시아문화대상을 받았다.

임아영 (경향신문 기자) 서울에서 초·중·고, 대학을 나온 뒤 2008년 신문기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사회부, 디지털뉴스국, 전국부, 문화부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인물>문화예술인>음악인>한국음악인 2014.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