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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용어]곡 제목에 붙는 알파벳은 무슨 뜻?

여풍2 2018. 10. 1. 09:38

[클래식 음악용어]

곡 제목에 붙는 알파벳은 무슨 뜻?

R군(22세)은 대형 음반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군대 가기 전까지 대학을 휴학하고 뭐 할까 고민하다가 워낙 음악을 좋아해서 선택한 일이 바로 음반 큐레이터 일이다. 온갖 프로그레시브 록, 헤비메탈과 포크를 두루 섭렵한 R군의 음반 추천 안목이 워낙 좋아 벌써 단골손님들도 하나둘 생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요즘 R군은 매장 안에서 따로 나뉘어 있는 클래식 음반 코너를 기웃거리고 있다. 클래식 음악 담당 큐레이터는 네 살 연상의 H양. H양은 본인이 음악을 좋아하는데다가 아버지가 소문난 음악 애호가다. 어려서부터 좋은 클래식 음반을 두루 들어온 ‘젊은 고수’로 통하는 보기 드문 케이스다.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다.

R군은 H양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가끔씩 크게 웃을 때 짓는 미소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꿈에도 여러 번 나왔다. 처음에는 말도 못 붙이던 R군은 한 달이 지난 요즘은 음악을 핑계로 H양에게 자주 말을 건다. H양은 친절하고 박식했다. 쉬운 말로 설명해주는 H양 덕분에 클래식 음악도 듣기 시작했다. 손님이 없어 한가한 오후, R군이 또 말을 건넨다.

클래식 음악의 제목에 수많은 알파벳이 붙는다. 각 알파벳은 작품번호를 뜻하며 각기 고유의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알면 작품 식별이 훨씬 쉬워진다.

작품번호 Op.와 No.

“누나, 쇼팽의 ‘겨울바람’이라는 게 어떤 곡이에요? 그 음반 좀 찾아주세요.”

“그 곡은 쇼팽이 작곡한 <에튀드> 중에 있어. 에튀드는 ‘연습곡’이란 뜻인데, 어디 보자. 요새 인기 있는 머레이 페라이어가 연주한 에튀드 음반이야.”

“이 중에서 어떤 곡이 ‘겨울바람’이죠?”

“작품 25 중에 11번이야.”

“이 음반엔 작품이란 말도 없고 몇 번이란 말도 안 씌어 있는 것 같아요.”

“Op.25 No.11이 그 곡이지. Op.25는 오푸스 25 또는 작품 25라고 읽으면 되고, No.11은 11번이라 읽으면 된단다.”

“클래식 음반에 Op.와 No.가 하도 많이 씌어 있어서 무슨 뜻인가 했더니 그런 의미였군요.”

“쇼팽은 연습곡을 두 번 출판했어. 한 번은 Op.10으로, 두 번째는 Op.25로 출판했지. 그것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단다.”

“그렇군요. Op.는 작품을 뜻하고 No.는 번호를 뜻하는군요. 알파벳 기호가 복잡하네요. 이번엔 바흐 음반도 한 장만 추천해주세요.”

“아, 그래? 잠깐만 기다려봐. 바흐 작품 중에 제일 재밌게 들을 수 있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바흐 작품번호 BWV와 헨델 작품번호 HWV

한참 음반을 고르던 H양은 한 장의 음반을 건넨다.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이다. R군은 음반 재킷을 살펴보다가 묻는다.

“그런데 여기에 BMW 988이라고 적힌 것은 무슨 뜻인가요? 글렌 굴드란 피아니스트가 독일차를 탔나요?”

“아, 그거? 호호호. 그 알파벳은 BMW가 아니고 BWV야” H양은 웃으며 대답했다.

“BWV? BWV라는 게 뭔가요?”

“바흐 작품번호를 말하는 거야. 볼프강 슈미더(Wolfgang Schmieder)라는 독일의 음악학자가 정리한 바흐 작품목록의 약자인 BWV를 쓴 거란다. 바흐 베르케 페어차이히니스(Bach-Werke-Verzeichnis)라고 하지. 모두 1126개나 있단다.”

“아하, 그렇구나. 1000개가 넘다니 엄청나네요.”

문득 생각난 듯이 R군이 말했다. R군은 바흐의 B가 BWV면 헨델의 H도 같은 경우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럼 HWV는 헨델 작품번호인가요?”

“어떻게 알았어? 맞아. 헨델 베르케 페어차이히니스(Händel-Werke-Verzeichnis)의 약자고 헨델의 작품번호를 말하지.”

모차르트 작품번호 K와 슈베르트의 D

“그럼 모차르트 작품번호는 MWV겠죠?”

“아니, 그건 아니야. 모차르트 작품번호는 쾨헬(Köchel)이야.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이자 광물학자였던 모차르트 연구가 루트비히 폰 쾨헬(Ludwig von Köchel)의 이니셜을 딴 것이지. 쾨헬은 총 626곡의 모차르트 작품을 연대순으로 정리해 번호를 붙였지. K.는 종종 ‘쾨헬 번호(Köchel-Verzeichnis)’라는 의미의 이니셜을 따서 KV로 표기되기도 한단다.”

R군은 쾨헬이라는 단어가 어딘가 익숙하게 들렸다. 어디에서 들었던 말 같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R군은 무릎을 치며 말했다.

“쾨헬? 그거 옛날에 우리 집에 있던 오디오 이름이었어요. 그게 모차르트 연구가의 이름이었군요?”

“그래. 유명 작곡가의 작품번호는 대개 그 작곡가를 연구하고 작품을 분류하는 데 애쓴 음악학자의 이름을 따는 경우가 많지. 여기 이 CD를 봐.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인데 D 911이라 붙어 있지? 슈베르트의 작품번호는 D로 표기하고 도이치(Deutsch)라고 읽어. 슈베르트의 권위자 오토 에리히 도이치(Otto Erich Deutsch)의 이름을 딴 것이지. 도이치는 총 998개의 슈베르트 작품에 연대기 순으로 작품번호를 매겼어. 잠깐 이리 와봐. 다른 것도 보여줄게.”

하이든의 작품번호 Hob

H양은 음반 진열대로 걸음을 옮겨 H로 시작하는 음반 진열장 앞에서 멈췄다. R군이 받아든 음반은 하이든의 교향곡 45번 ‘고별' 음반이었다. 그 음반엔 Hob.Ⅰ/45라고 씌어 있었다.

“하이든 작품번호는 뭘까?”

“홉? 호브? 에이치오비? 이건 어떻게 읽는 거예요?”

“호보켄이라고 읽어. 하이든의 작품에는 통상적으로 호보켄이라는 번호가 붙어. 네덜란드의 안토니 판 호보켄(Anthony van Hoboken)이라는 사람이 1857년과 1871년에 하이든의 음악을 정리했지. 호보켄은 유명 작곡가들의 자필악보를 사진으로 촬영해 방대한 양의 자료실을 만들어 운영했는데, 특별히 말년에는 하이든의 작품목록을 정리한 것으로 유명해.”

R군은 하이든의 다른 음반들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숫자와 기호 사이에 슬래시 기호(/)나, 로마 숫자 표기 등이 적혀 있었다. 다른 작곡가의 번호 표기 형식과는 어딘가 달라보였고 더 복잡해 보였다.

“이 번호는 좀 다르네요. Ⅰ/45라고 붙어 있는데.”

“호보켄 번호는 음악의 각 장르에 대해서도 분류가 되어 있지. 하이든의 교향곡 45번은 Hob.I/45 혹은 Hob.I.45라고 써. 앞에 붙는 번호는 교향곡은 I, 현악 4중주는 III, 협주곡은 VII 등 다양하지. 기호를 붙여서 장르를 식별하는 것이란다.”

“아하, 그렇구나. 호보켄!”

리스트의 작품번호 S

H양이 손님의 음반 계산을 돕는 사이 R군은 CD 진열장을 훑어봤다. 러시아의 명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가 연주한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음반을 집어 들었다. R군은 음반 표지에 적힌 영어와 알파벳 약자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Liszt piano concerto No.1이라고 쓰인 것은 이 음반이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담고 있다는 뜻이고, 그 옆에 S.124라고 적혀 있네요. 이게 리스트 작품번호인가요?”

음반 계산을 끝내고 H양이 돌아오며 말했다.

“이제 응용력이 생겨서 잘 아는구나. 리스트 작품번호를 의미하는 S는 ‘설’이라고 읽어. 험프리 설(Humphrey Searle)이라는 음악학자가 리스트의 곡에 작품번호를 붙였기 때문에 설(Searle)이란 이름의 첫 글자를 딴 거지. 자세히 말하면 1966년 <리스트의 음악(The Music of Liszt)>이라는 목록에 기초한 거야. 거기에 샤론 윙클호퍼와 레슬리 하워드라는 사람이 좀 더 연구를 덧붙여서 완성이 됐지. 험프리 설은 1915년에 태어난 영국의 작곡가인데 베베른의 제자이기도 했어. 피아니스트 리흐테르를 좋아하니?”

“아직 연주는 많이 못 들어봤지만 피아니스트 중에는 리흐테르, 호로비츠, 아르헤리치는 연주 스타일이 독특해서 마음에 남는 것 같아요.”

“호로비츠 좋아하면 이 음반도 들어봤겠구나. 이번엔 이 음반을 한번 살펴볼까?”

스카를라티의 작품번호 K와 L

H양이 진열대 앞에 꺼내 놓은 음반은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스카를라티 소나타 음반이었다.

“가만있자. 여기 보면 스카를라티 소나타에 K.380이라고도 되어 있고 L.23이라고도 나와 있네요. 쾨헬 번호가 여기 왜 또 나오죠?”

“거기서 K.는 쾨헬이 아니라 커크패트릭(Kirkpatrick)이라고 읽는 거야. 미국의 하프시코드 연주자 랄프 커크패트릭(Ralph Kirkpatrick)이 1953년에 600여 곡이 넘는 스카를라티의 건반악기 소나타를 정리하였는데 그 이름을 따 K.를 붙이는 거지. 커크패트릭은 스카를라티 말고도 바흐 등 바로크 음악 해석을 참 잘한 명연주자이기도 해.”

“아, 커크패트릭이라고 읽는 거구나. 그럼 여기 L.은 뭔가요?”

“L.도 역시 스카를라티 작품번호야. ‘롱고(Longo)’라고 읽지. 알레산드로 롱고(Alessandro Longo)는 이탈리아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야. 1944년 나폴리 음악원의 원장을 지낸 사람인데 1892년 나폴리에 스카를라티 협회를 설립하고, 스카를라티의 작품목록을 만들었거든. 스카를라티의 건반 소나타는 오랫동안 롱고 번호로 분류가 됐었지만 나중에 커크패트릭이 더욱 방대하고 꼼꼼하게 분류해서 요즘은 커크패트릭을 더 많이 쓴다더군. 내 얘기 듣고 있니?”

R군은 H양의 설명을 뒤로 하고 비발디의 음반을 찾고 있었다. 문득 영화 <샤인>에 나왔던 청아한 목소리의 노래가 문득 떠올랐다. 음반을 뒤적이던 R군이 CD 한 장을 집어 들고 말했다.

“아 네. 이 음반인 것 같아요. 지난번에 매장에서 틀었던 비발디 곡들이 아주 좋아서요. 그 영화 <샤인>에 나온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던가? 그 곡이 좋더라고요.”

비발디의 작품번호 RV

“비발디의 칸타타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Nulla in mundo pax sincera)를 말하는 거구나? 소프라노 에마 커크비의 목소리가 참 깨끗하고 천상의 목소리같이 느껴지는 곡이지. 누나도 아주 좋아하는 곡이야. 이제 비발디 작품번호를 공부해볼까?”

“RV라고 적혀 있네요. 마치 자동차 용어 같아요. RV, SUV? 이건 뭐라고 읽나요?”

“그건 뤼옴 번호라고 읽어. 안토니오 비발디의 작품 목록에 덴마크의 음악학자 페테르 뤼옴(Peter Ryom)이란 사람이 목록을 붙여 만든 것이지. RV는 뤼옴 번호(Ryom-Verzeichnis)의 이니셜을 딴 것이고.”

“아하, 뤼옴 번호. 여기 비발디의 <현과 콘티누오를 위한 콘체르토 C단조>에는 RV 120이라고 붙어 있네요.”

“그런데 비발디 작품번호는 뤼옴 번호 말고도 여러 가지로 표기되는 것이 특징이야. 음악사전을 보면 비발디의 모든 작품이 뤼옴 번호로 표기되어 있지 않지. 비발디의 작품을 분류하는 데는 뤼옴 번호 외에 Op., P.(팽슈를) 등 여러 가지 기호가 사용되는 경우도 많거든. 비발디의 명곡 <사계>는 잘 알지?”

“네,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좋아해요. 겨울은 대중음악에 사용되기도 했죠?”

“비발디의 협주곡 <사계>는 사실 <화성과 창의의 시도>라는 작품 중에서 3악장씩 첫 네 작품에 표제를 붙인 곡이거든. 조슈아 벨이 연주한 <사계> 음반의 뒷면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지. 어디 한번 차근차근 읽어볼까?”

“먼저 Concerto No.1 in E major, Op.8이라고 적힌 것은 비발디의 협주곡 작품 8 중의 1번 E장조의 곡이라는 것이고, 뒤에 붙은 RV 269가 뤼옴 번호지. 뤼옴 번호 269는 ‘봄’, 뤼옴 번호 315는 ‘여름’, 뤼옴 번호 293은 ‘가을’, 뤼옴 번호 297은 ‘겨울’(붉은색 사각형 부분)로 읽으면 된단다. 비발디 곡은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협주곡인 <프로메테우스> P.308처럼 뤼옴 번호가 아닌 팽슈를(Pincherle) 번호인 P.가 붙기도 하지.”

“와, 누나는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기 유명한 단골손님 오셨네요. 저분하고 음악 이야기하면 보통 30분인데.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보케리니의 첼로 협주곡에 붙은 G는 뭐라고 읽어요?

“아, 그건 제라르(Gérard) 번호야. 보케리니의 작품을 정리한 프랑스 음악학자 이브 제라르(Yves Gérard)의 이니셜이지.”

R군은 H양과 오래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그녀의 설명에 오늘 클래식 음악에 한 걸음 더 다가선 것 같았다. 어렵게만 생각했던 작품번호는 저마다의 색깔과 글꼴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작곡가들의 명함같이 느껴졌다.

류태형 (음악 칼럼니스트) 현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전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전 <객석> 편집장 역임.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누비길 즐겨 한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기획물 전체>음악의 선율>클래식입문 A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