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과 취미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

여풍2 2018. 9. 15. 08:31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minor, Op.54

Martha Argerich, piano

Antonio Pappano, conductor

Orchestra dell'Accademia Nazionale di Santa Cecilia

Roma, 2012.11.19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왜 여태까지 안 쳤을까?

‘피아노의 여제’라 불리는 아르헨티나 출신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정작 자신이 연주하는 레퍼토리에 대해서는 입맛이 까다롭기로 악명 높습니다. 모든 피아니스트가 경전처럼 떠받드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아직 협주곡 4번은 연주하지 않았지요. 지난 2008년 전남편이자 동료 피아니스트인 스티브 코바셰비치가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르헤리치는 “어린 소녀였을 때 베토벤은 내게 신과 같았다. 진정 사랑하는 건 손대지 않는 편이 현명한 게 아닐까?”라고 재치 있게 반문했지요.

아르헤리치는 ‘저녁의 대화(Evening Talks)'라는 인터뷰 영상에서 베토벤의 협주곡 4번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추억을 회상합니다. 여섯 살 때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듣다가 깜빡 졸고 있었는데 “2악장에서 트릴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율과 같은 충격이었다.”라고 털어놓았지요.

아르헤리치의 까다로운 음악 취향은 스승인 이탈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에게 물려받은 것입니다. 스승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극히 일부밖에 연주하지 않았고 쇼팽과 슈만, 드뷔시와 라벨 등 지극히 한정된 레퍼토리를 선보였지요. 하지만 한번 선택한 곡에서는 완전무결할 만큼 빼어난 기량과 해석을 선보이는 것으로 미켈란젤리는 유명했습니다.

아르헤리치가 지극히 연주를 꺼리는 곡들도 있지만, 반대로 거침없이 애정을 토로하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이 그렇지요. 아르헤리치는 이 곡만큼은 유명 지휘자나 교향악단과 수차례 협연한 음반과 영상을 남겨 놓았습니다. 슈만의 타계 150주년이었던 지난 2006년, 독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지휘: 리카르도 샤이)와 한 협연에서 아르헤리치는 대담무쌍하게 속도와 강약을 조절하면서도 유려하게 곡을 펼쳐 보였습니다. 그 순간 연주회는 슈만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작곡가에게 보내는 경배의 장이 되었지요.

마르타 아르헤리치(1941~ )

스위스 루가노 페스티벌에서 아르헤리치가 협연했던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음반(EMI)이 ‘음악 가족’의 따뜻한 대화라면, 바로크 음악의 거장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와 녹음한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텔덱)은 같은 곡을 두고 새로운 표현법을 찾아나서는 탐구 과정만 같습니다. 2002년부터 아르헤리치는 스위스 남부의 휴양도시 루가노에서 매년 여름 실내악 축제를 벌이면서 젊은 연주자 발굴에도 애정을 쏟고 있지요. 피아노 독주회는 사절하면서도 정작 실내악이나 협연은 사양하지 않는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일본에서 먼저 발매됐던 희귀 음반도 있습니다. 아르헤리치가 2001년 정명훈이 지휘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프랑스 샤틀레 극장에서 협연했던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실황입니다. 지휘자가 따뜻하면서도 진중하게 협연자를 배려하는 가운데, 피아니스트는 열정을 서서히 내뿜기 시작합니다. 둘은 2010년에도 한국에서 같은 협주곡으로 조우했지요.

자신이 꺼리는 작품들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곁으로 제쳐놓고, 아끼는 곡들은 언제 어디서든 꺼내서 연주하는 아르헤리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관객 입장에서도 혼돈스러워집니다. 우리는 연주자의 까다로운 ‘음악 편식’을 탓해야 할까요, 감사하게 여겨야 할까요.

출처 : 김성현, <스마트 클래식 100>(아트북스, 2013.05.29 초판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