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만상

대한민국의 '다키스트 아워'

여풍2 2018. 2. 13. 13:43

      [김대중 칼럼] 대한민국의 '다키스트 아워'


히틀러의 위장 평화 거부한 처칠의 리더십 다룬 영화에서 전쟁 위협 겪는 한국 떠올려
북의 通南封美 전략에 휘말려 친북·반북 갈려 극렬한 대립… 대한민국은 내부의 '전쟁' 中

               김대중 고문

                  

지난주 상영관이 얼마 없어 겨우 찾아서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를 봤다.

세계 2차대전 초기 독일의 영국 침공 직전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평화'로 위장된

히틀러의 항복 조건 타협을 거부하고 영국을 끝내 항전으로 이끌었다는 영국적 '애국 영화'다.

"전쟁에서 진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무릎을 꿇고 굴복한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처칠의 연설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런 후기(後記)를 남겼다.

"우리 현실과 너무 비슷하다" "우리 정치인들이 꼭 봐야 하는 영화다"

"전체주의 학살자와 협상은 없다는 영국 국민과 총리의 모습이 부러운 건 왜일까요?"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처넣고 어떻게 호랑이와 대화를 하라고 하나 하는 대사가 가슴에 와 닿았다"

등등.


사람들이 처칠의 리더십에 감동했다면 나는 당시 내각과 정치권의 끈질긴 협상 압력에 시달리던 그가
항복 거부를 결심하게 한 영국 국민(이 영화에서는 지하철 안의 승객들)들의 결연한 태도가 부러웠다.
지하철에서의 대화가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이 영화의 백미(白眉)는 지도자가 국민의
생각을 읽으려고 했다는 점, 국민이 정치인들보다 몇십 배 몇백 배 현명하고 애국적이었다는 점이다.

현재 북한이 한국을 침공한 것은 아니기에 우리 현실과 당시 영국의 상황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가해지고 있는 전쟁의 위협과 이에 대처하는 우리 지도자와
국민의 심정적 상황은 영화와 역(逆)으로 비교될 수 있다.
즉 우리 정치권(집권 측)은 북한과의 '대화-평화-민족끼리'의 대열에 하나로 뭉쳐 있는 반면,
우리 국민은 친북·반북으로 갈려 극렬하게 대립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를 어둡게 만드는 것은
바로 국민의 분열이다. 대한민국은 대북(對北) 문제에서 내부의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김정은의 처지에서 보면 대한민국처럼 '가지고 놀기 좋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내부에서 저렇게 싸우고 대립하는 나라에 통일된 전선이 있을 리 없고 그나마 현 상황을 지탱해온
한·미 동맹이 지금처럼 흔들리고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이런 호기(好機)를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핵무기 개발 할 대로 다 해놓고 한숨 돌린 뒤 사드, 한·미 군사훈련, 대북 제재 등으로 한·미 간을 이간시켜
저희끼리 친미·반미 하게 만들고 그사이에 '올림픽 평화' 공세를 펴면서 20대의 여동생을 보내
남쪽의 대통령을 오라 가라 해도 '바람에 촛불이 꺼질세라' 쩔쩔매는 남쪽 사정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지난 25년간 그의 선대(先代)가 미국과 협상→합의→파기를 반복하며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으로
시간을 벌어 왔다면, 김정은은 이제 남쪽의 분열을 배경으로 삼아 남쪽을 틀어쥐고 미국을 원격 조종하는
통남봉미(通南封美)로 방향을 틀었다.

김정은은 이제 한국을 손안에 쥐고 있으면
미국이 과감한 대북 전선을 펼치기 어려울 것임을 알고 있다.
한국 국민 사이에 '전쟁광 트럼프'를 앞세운 반미 기운이 조성돼 있고,
'우리의 동의 없이는 어떤 대북 무력행사도 있을 수 없다'는 문재인 정부의 단호한 천명으로
미국의 손발이 묶여 있는 동안 북한은 한국을 방패 삼아 유엔의 대북 제재마저 흔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체육 선수와 악단을 내려보내 한국 국민을 홀리고 한국 대통령을 평양으로 부르면서 북핵에는
'핵' 자도 못 꺼내게 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지도층은 왜 남북 정상회담에 그렇게 목을 맬까?
우리 대통령들이 과거 두 번이나 평양을 찾아가 돈 주고 자존심 상하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남북이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북한 주민의 생(生)은 얼마나 달라졌나?
역사의 진전이 과연 있었는가?
없다. 우리 대한민국이 두 쪽으로 갈린 것도 모자라
실체가 없는 '민족'의식이 무슨 패션처럼 번지고 있고 북한의 정치적 독재, 북한 국민의 인권 억압과
불행에는 무 관심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급기야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운명에도 무관심해지고 있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를 본 것은 목요일 오후 4시 신촌의 90석 규모 한 작은 영화관에서였다.
영화를 본 사람은 나와 다른 한 사람 단둘이었다.
지난 1월 17일 개봉한 이 영화의 누적 관객은 20여일 동안 2만3798명으로 집계됐다.
관람객이 없어 곧 상영을 중단한다고 했다.

[영화 리뷰] 다키스트 아워

처칠은 어떻게 처칠이 되었나
송혜진

발행일 : 2018.01.16 / 문화 A18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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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도 별다를 것 없는 사람이야. 그냥 보통 남자라고."

영화 '다키스트 아워(17일 개봉)'에서 윈스턴 처칠의 아내 클레먼타인(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이

불호령을 듣고 눈물 줄줄 흘리는 처칠 비서 레이튼(릴리 제임스)을 달래며 하는 말이다.

'다키스트 아워'는 바로 이 '별다를 것 없는 사람'이 1940년 5월 총리가 된 직후

프랑스에서 영국군을 철수시킨 다이나모 작전이 성공하기까지 3주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그려낸 '덩케르크', 그 전투 작전의 얘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아는 인물, 세상이 다 아는 얘기라서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조 라이트 감독은 이 뻔한 이야기를 꼼꼼하고 우아하게 점 찍듯 완성해냈다.

어떤 점은 울퉁불퉁하고 어떤 점은 흐릿하다.

그건 처칠이란 인물 자체가 애초 흠투성이였기에 그럴 것이다.

영국 역사학자 폴 존슨은 "처칠은 때론 딱하고 한심했다"고 썼다.

그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웬만한 일을 누워서 했다.

온종일 줄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물처럼 마셔댔다.

잘 걷지도 않아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도 꼭 차를 타고 갔고,

편의 따라 당적(黨籍)도 두 번이나 바꿨다. 라이트 감독은 이런 처칠의 흠집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별다를 것 없는 남자'가 이 과정에서 '남다른 남자'가 되는 건 이 영화의 아이러니다.

처칠이라는 세밀화는 게리 올드먼이 없었다면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올드먼은 늙고 뚱뚱한 처칠이 되기 위해 두꺼운 실리콘을 얼굴에 뒤집어썼고 라텍스 덩어리를 몸에 걸쳤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아챌 수 없다. 성마른 기침 소리, 고장 난 기계처럼 웅얼거리는 말투, 부들부들 떨리는 턱살까지 모두 처칠의 것이다. 평생 상(賞) 복 없었던 이 배우는 이 영화로 최근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일부에선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읽힐지 우려한다. 나치와 맞서 싸웠던 당시 영국 상황이

현재 북핵 위협에 얼어붙은 우리 모습과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영국 정치칼럼니스트 앤드루 론슬리가 쓴 글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처칠은 대중을 따라가지 않았다. 대중을 이끌었다.

처칠 흉내 내기에 바쁜 정치인들과 그가 다른 이유가 결국 여기에 있다."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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