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이해⑤] 인식의 전환이 새시대를 열다 - 인상주의
16세기 르네상스 화가 티치아노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19세기 인상주의 화가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는 비스듬히 누워있는 나체 여인을 그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표현방식과 주제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신화적인 인물이 아닌 일반인의 누드를 그리는 것을 금기시했던 16세기에 티치아노는 귀부인의 누드를 비너스에 빗대어 묘사했다. 붓 자국이 없이 매끈하게 표면을 처리하고 앞뒤 거리가 확실히 느껴지는 원근법을 사용했으며, 이상적인 인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자 했던 이 작품은 당시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반면 마네는 현실의 인물을 그대로 나타냈다. 손님이 보내온 꽃다발, 구겨진 시트, 한쪽 발에만 걸친 신발, 검은 고양이 등을 통해 그림 속 주인공이 성(性)을 파는 여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붓질 자국을 여실히 드러내고 원근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게 평면적으로 나타냈으며, 나체를 미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앞의 작품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신화적인 인물이 아닌 일반인의 누드를 그리는 것을 금기시했던 16세기에 티치아노는 귀부인의 누드를 비너스에 빗대어 묘사했다. 붓 자국이 없이 매끈하게 표면을 처리하고 앞뒤 거리가 확실히 느껴지는 원근법을 사용했으며, 이상적인 인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자 했던 이 작품은 당시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반면 마네는 현실의 인물을 그대로 나타냈다. 손님이 보내온 꽃다발, 구겨진 시트, 한쪽 발에만 걸친 신발, 검은 고양이 등을 통해 그림 속 주인공이 성(性)을 파는 여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붓질 자국을 여실히 드러내고 원근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게 평면적으로 나타냈으며, 나체를 미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앞의 작품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기사의 0번째 이미지](http://file.mk.co.kr/meet/neds/2017/09/image_readtop_2017_652544_15065864133046958.jpg)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19x165cm, 1537~1538, 우피치 미술관 소장(왼쪽)과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30x190cm, 1863, 오르세 미술관 소장. / Wikimedia Commons
마네의 <올랭피아>는 인상주의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인상주의 미술이 그 이전 시대 미술과는 다른 경향의 미술임을 알 수 있다. 인상주의 미술은 1860년대 말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몇몇 젊은 작가들이 보여준 새로운 경향의 미술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국가에서 주최하는 살롱전에서 수상해야만 공식적인 화가로 인정받고, 후원자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살롱전의 심사위원들은 엄격하게 균형 잡힌 구도, 명확한 윤곽선, 완벽하게 입체적인 형태와 같은 규정된 기준의 준수를 중시했다. 이 기준을 벗어나는 작품들은 인정받지 못했다.
모네,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등의 작가를 포함한 몇몇 화가들은 관(官) 주도의 살롱전에 대해 회의와 불신을 가지고 1874년 4월 스스로 경비를 충당해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전시는 1886년까지 총 여덟 번 개최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인상주의 미술전≫이다.
‘인상주의’라는 말은 첫 번째 전시에서 모네의 <인상:해돋이>를 보고 한 기자가 조롱의 의미를 담아 ‘인상 따위’나 그리는 화가들이라고 한 말에서 유래되었다. 인상주의 미술가들은 세 번째 전시부터 그것을 스스로 전시회 명칭으로 사용했다.
지금은 인상주의 미술이 전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것은 미술계에서 소외 받고 비난 받았다. 왜냐하면 기존 미술 양식과 달리 색채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원근법에 구애 받지 않는 표현법을 사용해 일상적인 소재들을 다루었으므로 파격적인 미술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미술가들은 제각기 다른 소재와 표현기법을 사용하여, 이전 미술과는 다른 자유로운 변화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 일어나는 일들을 소재로 삼았다. 마네가 튈르리 공원에서 열린 음악회 장면을 그렸고, 모네가 들판 건초더미를 그렸듯이, 인상주의 미술가들은 일상 속 인물이나 풍경을 대상으로 했다.
이전의 미술에서 미술가들은 신화와 성서 이야기, 역사적 사건, 왕족이나 귀족의 초상화를 주요 소재로 했지만 인상주의 미술가들에게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그 당시의 일상 풍경들이 주된 관심사였던 것이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http://file.mk.co.kr/meet/neds/2017/09/image_readmed_2017_652544_15065864133046959.jpg)
에두아르 마네, <튈르리에서의 음악회>, 76x118cm, 1862,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왼쪽)과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 60x100cm, 1897, 시카고 미술관 소장. / Wikimedia Commons
19세기 튜브 물감의 보급과 사진술의 발전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더 이상 화실에만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되게 하였고, 사실적인 묘사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화실을 나와 거리나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큰 변화였다.
인상주의 미술가들은 대상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신화 이야기나 역사적인 사건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주변의 모습이나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을 각자 개성 있는 방식으로 나타냈다.
인상주의 미술은 그 당시에는 파격적이고 반항적인 미술로 평가받았지만, 결국 미술에서 인식의 전환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예술가의 개성 있는 표현을 중시하는 현대미술의 특징을 고려할 때 인상주의는 현대미술의 문을 열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MK스타일] 글 / 임민영 (아트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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