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군중과 집단지성(LA조선일보) - 군중은 진화하지 않는다 -
멀쩡한 신사가 단체복으로 갈아입고 훈련장에 들어서면
말투나 몸짓이 엉뚱하게 일그러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끼리끼리 무리를 이룬 군중 속에 섞이면 개인의 분별력이나 수치심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곤 한다.
군중은 무엇에 이끌리는가? 본능과 욕망이다. 그 욕망을 들쑤시는 것이 선동이다.
선동가는 감성의 날것을 자극하는 상징조작과 집단적 이기심을 부추기는 포퓰리즘, 그 두 개의 미끼로
군중의 지지를 낚아챈다. 전체주의는 그렇게 시작된다.
“군중은 결코 진실을 바라지 않는다.
군중에게 환상을 제공하면 지배자가 되고, 환상을 깨뜨리면 희생자로 전락한다.”(귀스타브 르 봉 <군중심리학>)
군중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욕망은 현실에서는 충족되지 않는다. 오직 환상 속에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
환상은 실재가 아니다. 실재의 결핍이다.
그 결핍을 장밋빛 이데올로기로 덮어 실재처럼 꾸며내는 것이 선동의 속임수다.
거짓된 환상으로 군중을 기만하는 선동가는 누구인가?
입으로는 정의․공정․도덕을 외치면서 몸으로는 불의․불공정․부도덕의 흑막 뒤편에서 온갖 이권을
게걸스레 챙기는 위선의 특권층이다. 우리에게 너무도 낯익은 현실 아닌가?
선동가는 군중에게 적(敵)을 지목한다. 공통의 적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선동의 핵심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시민법정 배심원들 뒤에는 대중정치인 아뉘토스의 선동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군중의 함성 뒤에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선동이,
수백만 유대인을 가스실로 몰아넣은 홀로코스트 뒤에는 나치의 선동이 있었다.
적을 공격하는 것은 군중에게 정의가 되고 신성한 의무가 된다.
적개심과 의무감으로 심리적 일체가 된 군중은 생전처음 만난 옆 사람과 스스럼없이 얼싸안으며
함께 울고 웃는다. 일생일대의 감동이 군중심리를 타고 격랑처럼 일렁인다.
군중심리를 조직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전체주의의 팬덤(fandom)정치인데,
그 중심에는 신격화된 우상이 있다. 히틀러․스탈린․모택동․김일성이 그 팬덤의 우상 아니던가?
“편안하게 살고 싶은가? 군중 속으로 들어가라. 군중 속에 섞여 너 자신을 잃어버려라.”
니체의 말이다.
군중 속의 개인은 익명의 존재다. 이름 없는 개인은 어떤 일에도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성과 양심은 ‘진실 너머’로 증발되고,
선동의 구호와 군중의 함성이 탈(脫)진실(post-truth)의 가상세계를 이끌어간다.
선동가는 이것을 '직접민주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속에서는 집단지성이 싹틀 수 없다.
집단지성은 참여자 개개인의 독립성과 다양성과 책임성을 바탕으로 더불어 공동선을 이뤄가는
중지(衆智)이지만, 군중심리에는 개인의 독립성․다양성․책임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거칠고 즉흥적인 군중심리는 강력한 전염성을 지닌 집단광기의 바이러스를 품고 있다.
그 광기에 감염되지 않으려면 ‘군중 속의 고독’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 뒤에는 곧장 배신자의 낙인이 찍히고 돌팔매가 떼로 날아든다.
군중은 진화(進化)하지 않는다.
글 읽기의 고독을 싫어하는 군중은 문자매체보다 영화·티브이·유튜브 등 영상매체에 더 즐겨 빠져든다.
대중영화 한 편이 국가의 에너지정책을 뿌리째 흔드는 시절 아닌가?
광장은 넓어지고 거리는 화려해졌지만, 군중은 원시상태 그대로… 예나 지금이나 선동의 먹잇감일 따름이다.
과학문명사회도 다르지 않다. 거리와 광장이 온라인 네트워크로, 통계적 여론공간으로 옮겨지고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의 바탕인 선거마저도 여야 정치권의 입 발린 선동에 곧잘 휘둘리는 것이 현실정치의 비극이다.
가장 위험한 선동이 남미 좌파정권처럼 나랏빚으로 돈을 마구 뿌려대는 공짜복지 포퓰리즘인데,
그 뒤에는 빚더미에 짓눌린 미래세대가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투표소는 선동꾼의 놀이터가 아니다.
국민주권이 실현되는 집단지성의 산실(産室)이다.
군중심리의 음습한 그늘을 벗어나 집단지성의 밝은 터전을 열어가는 것이 깨어있는 민주시민의 사명이다.
선악을 거꾸로 뒤엎는 선동가들, 눈멀고 귀 엷은 팬덤종교 광신도들이 활개치는 세상에서는
자유민주의 헌법정신이 꽃필 수 없기에.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