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그날 밤 눈사람]-박동규
내가 6살 때였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이었는데, 아버지는 글을 쓰고 싶으셨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방에 상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책상이 없었던 아버지는 밥상을 책상으로 쓰고 있었죠.
어머니는 행주로 밥상을 잘 닦아서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책상에 원고지를 올려놓고 연필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세달 된 여동생을 등에 업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불 같은 포대기를 덮고서는
“옆집에 가서 놀다 올게.”하고 나가셨습니다.
나는 글 쓰는 아버지의 등 뒤에 붙어 있다가 잠이 들었죠.
얼마를 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누가 나를 깨워서 눈을 떠 보니까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깨우더니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네 어머니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나가서 어머니를 좀 찾아오너라.”
나는 자던 눈을 손으로 비비고
털모자를 쓰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가 보니까 무릎 높이까지 눈이 쌓여있었고
또 하늘에서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집 저 집 어머니를 찾아 다녔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지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집으로 돌아오려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니와 제일 친한 아주머니가 아랫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 한 번만 더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골목길로 들어서는데,
전봇대가 있고 그 전봇대 옆에 나보다 더 큰 눈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눈사람 곁을 스쳐 지나가는데
뒤에서 누가 “동규야~”하고 불렀습니다.
보니까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눈을 철철 맞으며 보자기를 머리에 쓰고 있었는데
그 보자기를 들추면서 가까이에 오시더니
‘너 어디 가니?’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볼멘소리로 어머니를 찾아오라고 해서
아랫동네 아줌마 집에 가는 길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어머니가 내 귀에 가까이 입을 대면서 물었습니다.
“아버지 글 다 썼니?”
나는 고개만 까딱거렸습니다.
어머니는 내 등을 밀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 사건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삽니다.
세월이 갈수록 내 머릿속엔
몇 시간씩이나 눈 구덩이에 서서 눈을 맞으며
세달 된 딸을 업고 있던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세달 된 내 여동생이 아버지가 시를 쓸 때 울어서 방해될 까봐
그렇게 어머니는 나와서 눈을 맞고 서 있었던 겁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서 처음 직장에 다닐 때 즈음이야
조금 철이 들어서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한 번 물었습니다.
“엄마, 그때 얼마나 힘들었어.
돈도 많이 벌어오지도 못하고, 그런데 어머니는 뭐가 좋아서
밖에 나가서 일도 하고 힘들게 고생하면서 애를 업고 있었어?”
나는 어머니가 우리 집 생활을 끌고 가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서 물어본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웃으면서
“그래도 니 아버지는 밤에 그렇게 시를 다 쓰고 나면
발표하기 전에 제일 먼저 나보고 읽어보라고 해~”
하고 웃으셨습니다.
- 박목월과 그의 부인 유익순
어머니가 아버지와 살아가면서 힘든 일을 겪어가면서
시인으로 살아가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시 한 편을 읽어보라’고 하는
아버지의 배려의 힘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사는 것은
이런 배려를 통해서 서로 사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 박목월 아들, 박동규의 글 -
2.박목월 작시[이별의 노래]에 얽힌 이야기
이별의 노래(박목월 시, 김성태 곡)/ 소프라노 박지현
[이별의 노래]
<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1986년에 나온 ‘박목월 평전·시선집’ <자하산 청노루>에서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대생과의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시가
박목월의 <이별의 노래>라고 아래와 같이 밝혔다.
< 목월이 피난시절 대구에서 알게 된 H씨 자매가 있었다.
자매가 모두 목월의 시를 좋아해 그를 자주 찾아왔다.
처음에는 흔히 있는 팬과의 만남 정도로 대했다.
그러는 사이 휴전(1953년 7월)이 성립되었다.
목월은 가족보다 먼저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의 대학들이 다시 문을 열었고 자매도 상경했다.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목월의 생가터.
언니가 결혼을 하자 이번엔 동생이 혼자 목월을 찾았다.
동생의 가슴에 사랑의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목월도 그녀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1954년 초봄부터, 두 사람이 서울의 밤거리를 함께 거니는 날이 많아졌다.
목월은 4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자책감으로 괴로웠다.
어느 날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있는 가까운 시인 Y를 불러
H양을 만나 자신을 단념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Y씨를 만난 H양, Y씨의 말을 듣고 나서,
“선생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
저는 다만 박 선생님을 사랑할 뿐, 이 이상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무상의 사랑은 누구도 막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제주의 초가
그해 여름이 가고 가을 바람이 불어 왔을 때
목월은 서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와 함께 제주도로 떠나 동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제주 생활이 넉 달째 접어들어
겨울 날씨가 희끗 희끗 눈발을 뿌리던 어느날
부인 유익순이 제주에 나타났다.
목월과 H양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온 그녀는
두 사람 앞에 보퉁이 하나와 봉투 하나를 내 놓았다.
보퉁이에는 목월과 H양이 입고 겨울을 지낼 수 있는 한복 한 벌씩이,
그리고 봉투에는 생활비에 보태 쓰라는 돈이 들어 있었다.
남편은 물론 H양에 대해서도 그녀는 전혀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고달픈 객지 생활을 위로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 앞에서 H양은, “사모님!”하고 울었다.
목월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
제주의 초가 설경
그 하숙생활은 그후 두 달 남짓 끌다 끝났다.
유익순 앞에서 울었던 H양은 목월을 단념하게 된 것이다.
결국 목월은 H양과의 이별 후 제주에 좀 더 머물다
1955년 초봄 가정으로 돌아왔다.
부인 유익순은 돌아온 남편에게 한마디도 탓하지 않고
반갑게 그리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목월은 전보다 더 충실한 가장이 되었다.
박목월 [朴木月, 1916.1.6 ~ 1978.3.24. 향년 62세]-1938년 유익순과 결혼.
한국시인협회 회장, 시전문지 《심상(心像)》의 발행인 등으로 활동한 청록파 시인.
주요 작품으로 《경상도가랑잎》,《사력질(砂礫質)》, 《무순(無順)》 등
유익순[1920 ~1997]: 박목월 시인의 아내(1938결혼)로 슬하의 5남매를 신앙으로 양육.
박목월과 효동교회 부부 장로로 봉사.'심상' 발행인 역임.1997년 77세로 별세.
박동규[1939 ~ ]: 1939년 경북 월성군에서 박목월 시인의 장남으로 출생.
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월간 시 전문지 '심상'의 편집고문.
- 옮긴 글 -
☎ 삶은 이렇게도 행복하지 않는가~
저물어 가는 사랑 . .
그 이별의 슬픔도~
이토록 아름답지 아니한가 . .
-여풍의 생각-
*나그네 인생길에 부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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