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의 pick] 심야식당 편
서울 태릉 '광성반점'
![](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812/28/2018122801173_0.jpg)
20세기 들어 인공조명이 완벽하게 세상의 밤을 정복하기 이전
선조들은 도깨비와 마녀와 악귀가 출몰하는 밤을 무서워하며 호롱불 하나에 의지해 글을 읽고 천을 짜며 시간을 보냈다.
이젠 도깨비도 마녀도 다 사라졌다. 도시는 영원히 잠들지 않는다. 심지어 택배마저 새벽에 배달되는 시대다.
자연히 밤을 낮 삼아 살아내는 도시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곳이 있다. 이런 부류의 음식점 중 대표는 기사식당이다.
요즘은 가성비를 앞세운 편의점 도시락에 밀려 도래지 철새처럼 조금씩 사라지고 있지만
그래도 영광스러운 때의 흔적을 찾자면 서울 망원동 '만복식당'이 가볼 만하다.
생선구이, 부대찌개, 김치찌개 등 알 만한 메뉴가 다 있지만 그중에서도 고추장불백이 이 집 명물이다.
고추장으로 양념한 고기에 양파를 큼직하게 썰어 같이 낸다.
투박하게 박힌 비계를 검은 철판 위에서 녹이듯 구워 상추에 흰 쌀밥과 같이 싸먹는 게 순서다.
아삭하게 씹히는 상추에 이어 두툼한 고기가 화롯불처럼 은근히 이어지는 매운맛을 품은 채 위장을 가득 채운다.
좁은 이면 도로에 차들이 밀리는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한밤에 먹는 우동 한 그릇은 육신(肉身)에 주입하는 칼로리 단위를 넘어선 또 다른 힘을 준다.
한밤에 먹는 우동 한 그릇은 육신(肉身)에 주입하는 칼로리 단위를 넘어선 또 다른 힘을 준다.
그래 봤자 밀가루 반죽으로 면을 뽑고 마른 멸치 등으로 국물을 뽑은 요리에 불과하지만 이 가난한 음식을 찾는 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서울 지하철 7호선 보라매역 인근에 '즉석우동짜장' 간판 하나만 달랑 내건 24시간 우동집이 있다.
멀리서도 객(客)이 찾는 곳이다. 문을 열면 세로로 긴 주방이 놓였고 그 앞에 놓인 바 카운터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텔레비전은 소리 없이 화면만 켜져 있다. 손님의 음성도 밤을 맞아 낮게 내려앉는다.
주문이 들어가면 그때그때 면을 뽑는데 한 번에 3인분을 넘지 않는다.
빠르고 정확한 몸동작 속에 밀가루 반죽은 가느다란 면으로 변한다.
디포리(밴댕이)와 멸치를 섞어 뽑은 육수는 너른 품으로 모두 껴안고 마는 푸른 바다처럼
모자람 없는 단맛과 깊고 또 깊게 탐닉하게 되는 감칠맛으로 꽉 짜여 있다.
포슬포슬한 감자와 고춧가루로 맛을 낸 짜장을 먹으면 거칠어진 입맛도 어느새 성질을 죽이고 졸린 고양이처럼 순해진다.
같은 7호선을 타고 반대편으로 달려가 태릉입구역 근처 뒷골목에 내린다.
같은 7호선을 타고 반대편으로 달려가 태릉입구역 근처 뒷골목에 내린다.
'광성반점'은 새들도 날지 않는 깊은 밤까지 웍(중화 냄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오후 4시쯤 문을 열어 다음 날 새벽 6시까지 영업을 하는 그야말로 심야 식당이다.
골격이 단단하고 백발이 성성한 주인장이 늘 날카로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전쟁을 치르듯 칼질을 한다.
칼질 사이사이 여유가 나면 강태공이 물고기를 낚듯 가게 한편에 앉아 신문을 읽는다.
밤에도 헤어지기 싫고 나누지 못한 밀어(蜜語)가 넘쳐나는 연인들은 서로 마주 앉아 불기운이 생생히 남은 간짜장을 먹는다.
그 옆의 취객들은 혀가 꼬이게 매운 겨자가 듬뿍 올라간 양장피를 앞에 두고 우정을 논하다 말고 세상을 욕한다.
케첩을 넣어 만든 소스를 입힌 탕수육도, 고추기름을 쳐 매콤한 난자완스도
이 집을 거쳐 가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먹게 되는 메뉴다. 모두 제각각 개성이 있는데
주인장은 그 비밀을 품은 채 격렬하게 불을 다루는 중간 중간 입을 다물고 글자가 빼곡히 들어찬 종이를 주시할 뿐이다.
이곳 형광등 조명 아래 앉아 있노라면 푸짐히 담아낸 음식은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고
친구와 아무리 이야기를 나눠도 헤어지기는 아쉽다. 그들을 위해 북위 37도 서울의 겨울밤은 일찍 시작해 늦게 끝난다.
노(老)주방장의 칼 소리는 멀리까지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