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만상

Aspen(아스펜)이라는 소도시

여풍2 2018. 9. 27. 20:34

로키 산맥 한가운데,

서부개척시대를 상징하는 이정표인 Independence Pass를 넘으면 나타나는 아스펜이라는 소도시가 있다.

그야말로 지상 천국이다. 더위도 싫지만 추위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내겐 아스펜의 여름이 특히 그러하다.


두 달 동안 계속되는 Aspen Music Festival, 고도가 무려 2400미터에 있는 (백록담보다 500미터 더 높다!) 이 도시 한가운데서

뜬금없이 열리는 비치발리볼 대회, 조그마하지만 없는 것 없는 그런 도심, 도시를 중심으로 뻗어가는 자전거길과 하이킹 트레일들,

그리고 시에 인접한 골프장과 컨트리 클럽들, 거의 영화에나 나올 법한 풍족하고 여유가 넘치는 도시이다.

(물론 겨울에 부유한 스키족들의 성지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스키장 자체는 콜로라도의 스케일에 비추어보면 그다지 크지 않지만, 중요한 건 여기서 스키탔다고 자랑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20세기 후반 이곳에 콘도와 집을 샀던 백만장자들이 이제는 억만장자들에게 밀려 나가고 있단다.

많은 미국 사람들에게는 아스펜으로 휴가를 간다는 것은 부의 상징과도 같다. 2010년 기준으로 이곳 집의 평균 가격이 600만불이라고 하니....

물론 이는 콘도뿐만 아니라, 산등성이에 가득한 저택들이 많은 수를 차지하는 이 곳의 특성을 감안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긴 하다.

그리고 활주로가 짧아 기껏해야 70인승 제트기만 내릴 수 있는 공항은 개인용 제트기로 가득차 있다.


아스펜이라는 도시는 원래 은을 캐내는 광산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원래 Ute라는 원주민들이 살던 곳인데, 금을 찾아 온 서부로 가던 일단의 광부들이 은광을 발견하고 난입하여 차지한 곳이다.

미국의 서부개척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한때 미국 최대의 은광이 있었던 자리답게 19세기 말에는 만오천의 인구에다가,

심지어 오페라하우스도 하나 있었다고 한다. 잠시 Ute City라고 부르다가 1880년부터는 Aspen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아스펜이 가진 여러 이미지 중 하나는 아마도 이곳에서 흔히 볼수 있는 Aspen 나무일 것이다.

Aspen 나무는 한국에는 없는 수종이지만, 사시나무과의 은사시나무가 그나마 비슷한 녀석이다.

하얀 나무 줄기와 부는 바람에 스스스스 소리를 내는 작고 여린 잎사귀들, 그리고 군락을 이루는 모습이 특징적인 나무이다.

한국에서 아스펜을 볼 수 있는 곳은 지금은 대관령면과 알펜시아 리조트, 그리고 한참 전에 본 적이 있는 서울에 있는 모 최고급 호텔의 로비인데,

후자의 경우 아마도 어린나무를 공수해서 심은게 아닌가 싶다.

지금 아스펜이라는 도시가 가진 고급스런 이미지를 생각하면 그렇게 이해 못할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가을이 오면서 잎이 노랗게 물든 아스펜 군락


Aspen 나무는 특이하게도 뿌리가 뻗어나가면서 스스로를 복제하는 방식으로 퍼져나간다.

이는 곧,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것과 같은 군락 하나가 하나의 뿌리와 동일한 DNA를 가지는 하나의 생명체라는 말이다.

하나의 개체가 산 하나를 뒤덮을 수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지구상에 있는 가장 큰 생명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Aspen 나무를 가로수를 쓰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대관령면의 경우 시내 주요 도로에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듯 한데, 최근에 심은 것이 티가 많이 난다.

아마도 겨울 올림픽 준비의 일환이었던 모양인데, 잘 자랄 수 있을지 걱정이다.

기후는 나름 잘 맞겠으나, 서로 너무 가까이 심어져 있는게 아닌가 싶다.

아스펜시에도 길가에 드문 드문 몇 그루 씩 모여서 자라는 Aspen 나무들이 보이기는 하는데,

가로수라기 보다는 길가에 있는 집의 정원에 심어져 있다는 편이 옳겠다. 아마도 뿌리가 퍼지는 것을 땅속에서 막아 놓은게 아닐까 싶다.


아스펜시는 스키리조트가 대개 그렇듯 산의 북쪽 경사면에 위치해 있는데,

공항 쪽으로 연결되는 82번 도로가 빠져나가는 부근인 북서 코너에 아스펜 물리학 센터, 아스펜 음악제가 소유한 콘서트홀과 Music Tent,

그리고 이들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Aspen Institute 등이 모여 있다.


원래 그 일대는 Aspen Insitute의 소유였다고 하는데, 무슨 복잡한 일이 있었는지 중동계 자본에게 넘어갔다가,

이 세 단체와 아스펜시, 그리고 그 업체 간의 5자 협상을 통해 단체들은 각기 부지를 얻고 업체는 남은 대지의 개발권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물리센터는 작지 않은 현재의 부지를 명목상 단돈 10불에 샀는데, 다만, 변호사 비용이 10만불 수준이었다는게 함정이라면 함정.

이 협상을 통하여 아스펜시는 학문과 문화과 예술의 중심이라는 훌륭한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업체는 개발에 유리한 조건을 얻는 성과를 얻었다.


물리학 센터는 지금은 Stranahan, Bethe, Smart의 세 건물에 40여개의 사무실과 강의실 세 곳, 토론을 할수있는 장소 다수,

그리고 도서관 하나로 꾸며져 있고, 매일 12시 반에 샌드위치 트럭이 들어와 점심을 판다.

오전의 세미나와, 잔디밭 점심과, 오후의 토론을 하다보면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고, 그렇게 하루가 쉴 틈 없이 움직인다.


왼쪽부터 Smart, Bethe, Stranahan. 벤치들 우측, 낮게 보이는 기념석에는
아스펜에 오는 길에 사망한 고 Benjamin Lee(이휘소박사)를 기리는 동판이 있다.
가장 오래된  건물인 Stranahan Hall. 이곳 캠퍼스 역시 Aspen나무들이 무성하다.


시내에 있는 콘도들의 많은 수가 별장으로 사용되다 보니, 일년 중의 상당기간은 관리와 렌트를 대행 해주는 업체에 맏겨져 있다.

물리학자들도 그렇고, 음악제 참가하는 연주자와 학생들도 그렇고, 이런 콘도를 빌려 몇 주씩 생활한다.

올해 들리는 이야기로는 요즘은 워낙 거부들이 콘도들을 매입하다보니,

외부인에게 렌트해 주는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센터 사람들이나 음악제 관계자들이 걱정을 하는 모양이다.


아스펜시는 이 행사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관광객을 위하여 한여름 내내 시내버스들을 운행하는데,

바로 옆의 또 하나의 스키타운인 Snowmass 정도까지는 공짜로 타고 다닐 수 있다.

과연 여기가 자동차의 천국인 미국이 맞나 하고 생각될 정도이다.

뉴욕, 시카고,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등과 함께, 출장 오면서 자동차를 빌려야 하는 수고를 할 필요 없는 몇 안 되는 미국 도시 중 하나이다.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