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만상

[역사, 영화를 만나다 -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

여풍2 2015. 1. 6. 09:00

[역사, 영화를 만나다 -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

탐관오리 잡고 백성 돌보는 ‘조선판 탐정’ 있었다

암행어사, 지방관리 비리 감찰·백성 은원 해결 등 오늘날 탐정과 비슷

1794년 은밀한 왕명받은 정약용도 적성·연천 등 경기도 일대서 활약

30대의 정약용, 정조의 총애받는 천재적인 기술관료로 주요관직 거쳐

신유박해로 18년의 긴 유배생활… 실학사상 집대성·수많은 저서 집필


2011년 겨울 퓨전사극을 표방하고 나온 영화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은

관객 수 500만 명을 돌파하며 제작비 대비 공전의 히트를 친 영화로 손꼽힌다.

이 영화는 코미디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장르가 마구 뒤섞인 그야말로 퓨전(fusion) 영화답게,

역사적 사실 또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끌어와 재미있게 재구성했다.

영화는 18세기 말 정조시대 실학의 부흥, 무역을 바탕으로 한 상업의 발달, 천주교의 도래, 노론들이 주축이 된

신권과 정조의 왕권 강화책과의 갈등 등 역사적 상황을 바탕에 깔고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주인공인 탐정(김명민 분)은 그 이름을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은데, 아마도 정약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 명탐정의 모델, 천재 기술관료 정약용


영화에서는 마치 조선 후기에 탐정이라는 관직이 있었던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탐정(探偵)이라는 한자는 ‘드러나지 않은 사정을 몰래 살펴 알아낸다’는 의미로

일본에서 영어 단어 ‘detective’를 번안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탐정과 비슷한 일을 한 관직이 있다면 그것은 암행어사일 것이다.

암행어사는 지방관의 비리를 알아내 벌을 주는 역할도 하였지만

민간을 사찰하여 백성의 은원을 해결해주는 일도 하였다.


조선 후기 뛰어난 실학자이자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정약용(1762~1836)은

1794년 은밀히 왕명을 받고 적성(積城)·마전(麻田)·연천(漣川)·삭녕(朔寧) 등

경기도 일대에 암행어사를 나간 적이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된 적성 지역이 바로 정약용이 암행어사를 나간 곳이다.

암행어사로 나간 정약용은 백성의 참상을 직접 둘러본 후

지방 관료들의 비리를 밝혀내 연천의 전 현감 김양직과 삭녕의 전 군수 강명길을 탄핵했다.

또 뇌물을 바치고 관아에 자리를 얻은 사람을 찾아내 그들의 임명장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뿐만 아니라 현재 경기도 파주에 있는 고을 적성을 암행한 후

백성들의 실상을 ‘적성촌에서’라는 제목의 한시로 남겼다.


“깨진 항아리 새는 곳은 헝겊으로 때웠으며 /

무너진 선반은 새끼줄로 얽었도다 /

구리 수저 이정(里正)에게 빼앗긴 지 오래인데 /

엊그제 옆집 부자 무쇠 솥 앗아 갔네.”


백성의 고달픈 삶의 원인을 지방관과 아전을 포함한 토호세력의 횡포로 보고 고발하는 내용이다.

정약용은 암행어사 당시의 경험을 훗날 《목민심서》에도 자세하게 기록해놓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암행어사 직무에 충실했던 정약용은

당시 경기관찰사 서용보의 심기를 건드려 정조 사후에 18년 유배생활의 씨앗을 뿌리기도 했다.

이때 정약용의 나이 33세였다.

영화 속 명탐정이 임오년생이라고 나이를 밝히고 있는데

임오년은 1762년 정약용이 태어난 해다.

영화에서 탐정은 수찬(修撰:조선시대 홍문관의 정5품 관직)의 자리에 있다가 명목상으로는 임금의 명으로 남편을 그리다 따라 죽은 열녀에게 정표를 내리기 전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적성으로 간다. 정약용이 암행어사를 가기 전 직위도 홍문관 수찬이었다.

정약용이 적성 방면의 암행어사로 간 이유는 물론 영화처럼 연쇄살인범을 잡는 일은 아니었다. 정약용은 경기 서북부 일대의 농촌 상황을 살피고 지방 수령을 감찰했다. 당시 정조의 총신이던 30대 초반의 정약용은 임금에게 직언을 올릴 수 있는 패기만만한 젊은이였다. 흔히 정약용은 그의 엄청난 저작물과 깊이 있는 사상으로 철학자나 개혁가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그의 말년 18년간 유배생활의 업적이고 30대의 정약용은 새로운 배움에 목마른 재기발랄하고 천재적인 기술 관료였다.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마현(지금의 남양주 조안면)에서 진주목사의 벼슬을 지낸 정재원(1730~1792)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강 상류의 풍광이 아름다운 고향에서, 흔히들 역사에 업적을 남긴 학자들이 그렇듯 신동이라는 소문을 달고 자랐다. 그의 외모에 대한 기록을 보면 어릴 적 천연두를 앓은 뒤 오른쪽 눈썹에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정약용의 호로 주로 ‘다산’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에게는 외모를 따서 ‘삼미’(눈썹이 세 개라는 뜻)라는 호도 있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6세 무렵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의 유고를 읽고 그의 제자를 자처하였다. 신분적으로 사상적으로 정약용을 근기남인(近畿南人)으로 분류하는데, 서울경기 지역에 살면서 이황의 학풍을 따르며 정치적으로는 남인을 말한다. 이들 근기남인은 서울이라는 중앙 정치무대와 가까이 살았기에 누구보다 현실정치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다. 그래서 이들 근기남인으로부터 현실 학문인 실학이 태동될 수 있었다.

농업중심의 사회개혁 추구 ‘근기남인’의 등장

조선 후기 실학은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지 못하는 경직된 전통 유학으로부터 현실에 적용하여 실용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학문 방향을 모색한 유학의 한 분파다. 실학은 이전의 성리학적 가치관과 완전히 결별한 전혀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유학 속에서 민생을 도모하는 실용성을 찾아낸 당대 유학자 지식인들의 자기반성적 고뇌와 노력이 깃든 사상이었다.

중앙 정치무대에서 실제 정치를 하던 노론 가문의 자제들 중에서는 수차례의 중국 왕래를 통해 서양과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상업을 중심으로 조선을 개혁하자는 북학파가 등장했다. 박지원을 필두로 박제가 등 그의 제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북학파란 말도 박제가가 중국사행을 따라 갔다 와서 지은 책 《북학의》에서 연원하였다.

북학이란, 말 그대로 북쪽에 대한 학문, 즉 우리나라에서 북쪽에 있던 중국의 문물을 연구하고 받아들이자는 학문을 말한다. 요즘으로 옮겨 말해보자면 사회 지도층의 자녀들이 유학을 다녀와 자신이 유학한 나라의 선진적 시스템을 들여와 나라와 조직을 재편해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노론 독주의 중앙정계에서 밀려나 있으면서 농촌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던 남인들은 토지를 바탕으로 한 정치·경제·사회적 개혁을 꿈꾸었다. 남인들은 집권세력이 아니었기에 친인척을 따라 중국으로 외유할 경험도 적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대신 중앙 정치무대에서 소외되어 있는 대신 자신이 발붙이고 사는 향촌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밭 갈고 논 매는’ 농부들과 평생을 함께 어우러져 살았고, 그 속에서 양반이지만 본인이 직접 농사일을 거들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농촌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어 모순을 깨닫고 변화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들 남인을 중심으로 토지제도나 세제의 시스템을 변화시켜 나라의 개혁을 이루어보자는 주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농업 중심의 사회개혁을 추구한 이가 성호 이익(1681~1763)이었다. 성호 이익은 반계 유형원에서부터 시작된 향촌의 농업 중심의 실학사상을 제자육성을 통해 널리 펼친 중조격이었다. 이익의 사상은 근기남인을 중심으로 널리 펴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향권 안에 정약용도 있었다. 정약용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근기남인들은 이익의 사상을 받아들여 이를 현실정치에 펼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들의 근거지가 한양 근처였기 때문에 중앙 정치무대로의 진입은 더욱 갈급한 숙제였다.

그러나 정조의 등장 이전, 근기남인은 영조 때 노론 독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다. 개혁 사상과 그 의지가 강했지만 막상 개혁을 위한 정치적 발판이 마련되어 있지 않던 그들에게 길을 열어준 사람은 바로 정조였다. 근기남인 입장에서 정조는 그야말로 든든한 정치적 은인이자 후원자, 파트너였다.

서양의 학문 중 하나로 뿌리내린 조선의 천주교

정약용과 정조의 유대관계는 정약용이 20대 초반 성균관(오늘날 국립대학, 서울대학교라고 보면 된다)에 다니던 시절, 그 총명함이 정조의 귀에 들어갔고, 28세에 대과(과거의 최종단계)에 2등으로 급제하면서 결정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정조의 최측근으로 가주서(假注書:승정원의 대리 임시관직), 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 관직), 교리(校理:집현전·홍문관·승문원·교서관 등에 둔 5품 관직), 부승지(副承旨:승정원의 정3품 관직) 및 참의(參議:육조의 정3품 관직)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그야말로 화려한 관료생활로 30대를 보냈다.

임금이 밀어주는 천재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다소간 경솔한 면도 없지 않았다. 젊은 나이의 정약용은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과 과학기술에 열광하고 이를 더 배우기 위해 종교도 쉽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천주교와 함께 들어온 서양문물을 좀 더 알고 싶어 23세 무렵 서학(西學·천주교)에 관하여 듣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즉 가톨릭 유입의 역사는 매우 독특하다. 우리나라는 천주교 포교 역사상 유일하게 포교를 하러 들어가기 전에 먼저 천주교를 받아들인 나라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천주교에 접근한 이유는 서양의 학문을 연구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래서 천주교를 종교로 보기보다는 서양의 학문으로 보아 서학(西學)이라고 불렀다.

중국에 사신으로 간 조선의 관료와 학자들은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 당시 북경에 나와 있던 서양의 선교사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책을 조선으로 들여와 연구했다.

이들 서학 관련 서적은 주로 남인 학자들 사이에서 연구되어 이들의 실학사상에 일정 정도 영향을 주기도 했다. 중국으로의 출입이 빈번하던 북학파들보다 남인들이 서학에 더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얼핏 아이러니해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사상적 유사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앞서 말했듯이 요순시대의 순수함과 어진 임금을 요구하는 사상적 한 측면이 신 앞에서 평등사회와 구세주라는 개념과 맞아떨어졌던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원래 서양의 종교와 학문을 아우른 개념으로 연구하던 서학을, 학문적인 관심을 넘어 신앙으로 수용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이익의 제자들 중에서 이런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권철신(1736~1801), 이벽(1754~1785), 정약전(1758~1816) 등이 그들이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형이다. 정약용도 형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경도되었고 젊은 시절 별다른 고민 없이 쉽사리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결국 천주교의 교리에서 제사를 모시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에 부딪혀 그는 곧이어 배교(背敎)했다. 하지만 서학에 심취했던 과거는 정약용의 생애 후반,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정조 때 처음 천주교 박해를 했을 때 정약용은 그 친인척들과의 관계와 세례 전력 등으로 곤란해지기도 했는데, 당시에 그가 배교를 밝혔고 정조의 총애도 있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다시 노론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정조 때 등용되었던 남인세력을 내모는 명분으로 천주교를 문제 삼자 이는 결국 정약용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로 인해 정약용은 정조 사후 일어난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18년간 전남 강진에서 기나긴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 기간이 정약용 본인에게는 상당히 쓰라린 시기였을지 몰라도 우리나라 지성사에 있어서는 빛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유배생활 동안 정약용은 정치·경제·사회 등 학문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자신의 어마 어마한 저작을 남겼기 때문이다.

다소 과장되고 코믹한 설정이지만, 영화 속에서 탐정이 큐빅 퍼즐 하나 얻기 위해 섣불리 세례를 받고 이것이 내내 약점이 되는 것은 정약용의 인생과 거의 흡사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뛰어난 과학자이던 30대 정약용의 성격은 어땠을까? 영화 속 명탐정처럼 코믹하고 경박하진 않을지라도 꽤나 유쾌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젊은 시절 도박을 해보기도 했고,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 술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옷깃에 꽃이 다칠까 봐 꽃나무를 둘러싼 대나무 울타리를 직접 만들었다고 하니 다정하기도 매우 다정했던 것 같다.

정조의 전폭적 후원과 총명한 머리, 올곧은 가치관과 정치적 포부를 두루 갖추었던 젊은 나이의 정약용. 어쩌면 그도 영화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 속 주인공처럼 기록되지 않은 삶의 어느 한순간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며 조선의 거리를 종횡무진 질주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글쓴이 김정미 = 시나리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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