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만상

살아 보니 90세 이후 가장 힘든 건 고독이에요

여풍2 2018. 6. 15. 00:04

[장광팔 만담가의 세상토크]

“살아 보니 90세 이후 가장 힘든 건 고독이에요”

내년 100세 맞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약속한 북카페로 사뿐사뿐 걸어 들어오는 백수(白壽)의 노 철학자 김형석 교수.

물 위를 걷는 게 기적이 아니라 땅 위를 저렇게 걷는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 건 그의 건강 때문만은 아니었다.
100년 근현대사를 바르게 살아온 그의 흔적이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 속 소년처럼 미소 가득한 선생의 눈길은 봄기운처럼 따뜻했다. 봄〔春〕은 봄〔視〕이지 않는가.
선생은 물음에 막힘이 없었다. 명쾌하되 자극적이지 않았다. 작금의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현상에 대해 물으니 가해남성이
“자신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아 생긴 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순간 새벽녘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쇠락해졌다.
결혼에 대해서는 사회에 봉사하는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건 분명 축복이란다. 여성은 모름지기 아름다운 감정을 가져야 한단다.
아름다운 감정으로 긁는 바가지 소리는 아름답단다. 혼자 되면 재혼하되 나이 차이는 적은 게 좋단다. 짓궂게 선생에게 재혼할 생각은
없으신가 여쭈니 “우리 나이 99세면 결혼하기에는 좀 늦은 것 아녜요?”라며 만담으로 받아준다. 선생은 시종 유쾌하고 유머가 넘쳤다.
또 하나, 어떤 비유를 오래 들다가도 정확히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인터뷰를 함께한 김혁수 한국야쿠르트 상임고문의 표현대로
“예전 천장에 검정 고무줄로 매달아놓았던 유엔 팔각 성냥갑” 같았다.
 
 
 
중학교 4학년 때까지 교회생활

장광팔(이하 장) 선생님을 뵈니까 봄기운이 완연합니다.(웃음) 신간을 또 펴내셨던데, 책 보따리부터 풀어볼까요?

김형석(이하 김)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는 같은 제목의 글을 새로 쓰고, 예전에 쓴 수필 중에서 고갱이 같은 글을 선별해 펴낸
책이에요. <백년을 살다 보니>는 작정하고 쓴 책은 아니에요. 출판사에서 나이 드신 분들 이야기를 시리즈로 펴내며 청탁하기에 아주
쉽고 편하게 쓴 책인데, 호응이 좋더군요. 다음에는 조금 수준을 높여 읽을 만한 책을 펴내려고 해요.

어떤 책인지 벌써 궁금해집니다.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데 관심이 많잖아요. 미국에서도 행복론을 많이 다루는데, 행복을 찾기 위해 한 가지 일을 마치고 나서
또 다른 일을 찾다 보니, 사실은 행복을 위해 하는 일 때문에 행복을 빼앗기고 있어요. 지금 우리도 그런 경향이 있지요.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사회는 ‘나’ 중심의 행복을 찾으려고 해요. 그런데 행복은 ‘나’가 아닌 대인관계 속에서 생기는 거예요.
이웃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게 동서양의 차이예요.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죽음이 찾아왔을 때
‘나는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지 않은가?” 이런 주제의 글로 탈고했는데, 책은 가을쯤 나올 예정이에요. 이런 분야 책은 이것으로 끝낼 작정입니다.

1960년대 <영혼과 사랑의 대화>가 이른바 ‘낙양의 지가’를 올렸죠?(웃음)

연세대 조교수로 있을 때인데, 마침 미국 하버드대학교 연구교환교수로 가게 되어 출판사에 원고만 넘기고 1년 있다가 오니까
그 책이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더라고요. 밖에 나가 있기를 잘했지, 한국에 있었으면 조용히 살지 못할 뻔했어요.(웃음)
비소설 분야 책이 소설보다 많이 팔린 역사적인 책이 됐지요.

<어떻게 믿을 것인가>라는 책도 오랫동안 사랑받았지요.

하루는 젊은 출판사 사장이 찾아와서 조부께서 <예수>란 책을 보여주면서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좋은 책이니 이런 책을
꼭 한번 펴내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제가 쓴 책인데 시장에서 반응이 신통치 않았거든요. 제가 말리다가(웃음) 절판된
<한국 기독교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책을 다시 고쳐 <어떻게 믿을 것인가>란 제목으로 냈는데, 뜻밖에 오랫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그 후 제가 개인적으로 성경 공부하는 곳에서 나눈 내용을 묶어 펴낸 책이
<인생의 길, 믿음이 있어 행복했습니다>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고 중학교 4학년 때까지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그런데 목사님 설교가 10년이 지나도 똑같아요.
이러다가는 교회가 사회의 성장에 뒤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름 책을 읽으며 신앙심을 키웠습니다. 기독교는 역사와 사회를
책임지는 역할을 해야지요.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교회를 걱정하거나 좋은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다행히
교회에서 충족되지 않아 더 깊은 뜻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봐요.
기독교 관련 책 세 권이 이렇게 해서 읽힌 것이라 짐작됩니다.
 
 
확실한 경제관 갖고 살아야

선생님 글 중에 자기들끼리 서로 속이고 죽이는 세 강도 얘기를 소개하면서 “돈은 악마와 같이 우리를 유혹한다”며,
“그 유혹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삶과 인격을 잃었는지 모른다”고 쓴 글이 생각납니다.

돈 이야기하라고요?(웃음) 국가는 다음 세 가지를 책임져야 해요.
첫째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고, 둘째는 평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셋째는 의료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이 가운데 으뜸은 절대빈곤에서 벗어나는 일이에요. 개인적으로 보면 가난한 사람에게 경제관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예요.
제 경우만 해도 빈털터리로 탈북해서 중앙중학교에서 7년간 교편을 잡아 경제적으로 좀 안정되나 싶었는데, 6·25 전쟁을 겪으면서
모든 걸 잃었죠. 아이가 여섯이고, 이북에서 온 동생이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닐 나이라 부양가족이 10명이었어요.
당시 제가 연세대 교수였는데 봉급만으로는 힘들었어요. 돈이 되는 일이면 글도 쓰고 특강도 나가는 등 모든 제 생활이 ‘돈 중심’으로
돌아갔어요. 물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는 했지만 한평생 돈을 위해서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패턴을 바꿔 ‘돈의 가치’보다 ‘일의 가치’에 방점을 두었어요. 그때가 40대였는데,
내 인생을 위해서 일의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고 한 30년 살다 보니 인생도 풍요로워지고 수입도 오히려 더 늘더라고요.(웃음)

지금은 세 번째 단계로 ‘나를 위해서는 적게 남겨두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더 많이 주는’ 값있게 쓰는 가치가 남아 있어요.
작년에 상금이 큰 상을 두 개 받았는데, 사회를 위해 쓰도록 제자들에게 맡겼어요. 제 가치관 중 하나가
‘내가 번 돈이 아닌 돈은 나를 위해 써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상금은 내가 번 돈이 아니잖아요.(웃음)

‘가난할 때는 열심히 돈을 벌고, 가난을 벗어나면 일을 위해 일을 하고, 또 그것을 벗어나면 사회를 위해 값있게 쓴다.’
이것이 제 경제관이에요.

사회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20대 때 일본에서 공부하며 느낀 건 ‘우리보다 정말 부지런한 민족이구나’라는 자각이었어요.
미국에서 20년간 공부하며 본 미국사회는 ‘일의 가치를 사회가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일해서 번 돈을 사회가 함께 나눠 가져요. 세금을 많이 거둬도 불만이 없죠.
노후에 내가 행복하게 살려면 일할 때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누구보다 많이 베풀고, 그 베풂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회가 되어야죠.
확실한 경제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경제관이 없으면 돈의 노예가 되니까요.
 
 
성폭력 문제는 인격과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

세 도적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돈’을 ‘욕정’으로 바꿔 재인용하면 ‘욕정은 악마와 같이 우리를 유혹한다.
그 유혹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삶과 인격을 잃었는지 모른다’고 치환할 수 있겠지요.
요즘 ‘미투(Me Too)’ 열풍으로 사회가 들끓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에요. 자신의 인격을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을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저지르는 사람은
우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런 태도는 자신에게는 인격 결핍이요, 인간관계에서는 사랑 결핍이지요.
이런 사람이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다면 건전한 사회가 아니에요.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한다는 건 바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인격을 지키는 일이거든요.

선생님 글을 보니 청주에 사는 팔십 넘은 제자와의 정이 아름답던데요.

이제 제자들도 다 팔십이 넘었어요.(웃음) 가끔 지나가다 보면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다가와서 인사를 해요.
“저, 연대 제자입니다.” 정진석 추기경도 제가 중앙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에 제자예요. 담임도 했고요.(웃음) 이제 87세인가.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공과에 입학했는데 6·25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그 후 가톨릭대 신학과를 들어가 신부가 되었지요. 얼마 전 서울교구에서 제가 강연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은사님 오시는데 강의 들으러 가야죠”라고 하면서 온다기에 반가웠는데, 건강이 안 좋아 못 온다고 연락이 와서 아쉬웠어요.
 
 
오래 산다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연습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특별한 건 없어요. 일반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규칙적인 운동은 건강에 도움을 주지요. 그러나 무리한 운동은 오히려 해로워요.
50대 후반이 되어서야 나에게 맞는 운동을 찾아봤어요. 정구를 하려니 짝하고 시간을 맞춰야 하고, 등산을 해보니 시간 투자가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래서 수영을 시작했어요. 시간 날 때 혼자 할 수 있어 좋고요,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고 폐활량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구강을 많이 움직이니까 발음이 새지 않아서 강연에도 도움이 돼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 건강관리 못지않게 정신적인 건강관리가 중요합니다. 자기관리를 잘해야 돼요.

치매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가족은 물론, 자신의 자존감 상실과도 직결되는 질병인데요.

치매는 자기가 컨트롤할 수 있는 질병이 아니지요. 평소 리듬을 유지하는 자기관리가 중요하다고 봐요.
적당한 운동과 정신적인 일을 지속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제가 팔십 초반일 때 일을 좀 줄여보려고 했는데,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들더라고요. 교수들이 방학 때 병이 많이 나요.(웃음) 그래서 60대 때 가진 일의 리듬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요.
읽고, 쓰고, 강연하고, 운동하고, 쉬고, 숙면을 취하는 것이 글쎄 치매 예방이랄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하면 좋지 않아요. 자기 능력을 100이라고 보았을 때 80 정도 일만 맡는 게 좋아요.
그러면 120을 발휘할 수 있지요. 매사에 여유를 갖는 게 중요해요. 살다 보니 구십 이후에 가장 힘든 건 고독이에요.
오래 산다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연습이잖아요. 그나마 저는 일이 많아서 다행이지요.(웃음)
 
 
구십 넘은 친구들 가고 나니 세상이 빈 것 같아

고독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지요.

정신력이 빈곤한 사람이 느끼는 건 고독이 아니에요.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혼자 있지 못하니까 자꾸 나다니는 거예요.(웃음)
그런데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느끼는 고독은 자기성장이나 자기유지에서 오는 고독인데, 이게 힘들어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 유언처럼 “내가 걱정스러운 건 네 처도 아픈데, 나도 가고 네 처도 가면 집에 너 혼자 남을 텐데
어떻게 하지?” 그러세요. 그때는 그 의미를 몰랐는데 ‘재혼이라도 해서 혼자 있지 마라.’ 그 말씀이셨어요.
어머니가 가장 가슴 아파하신 건 아들이 혼자 남는다는 것, 아들의 고독이었어요. 어머니가 가시고 아내도 가고 빈집에 혼자 남으니
도둑처럼 고독이 찾아왔어요. 미국 딸네 집에 다녀와서도 예전 같으면 공항에 내리자마자 ‘어서 집으로 가야지’ 했는데,
집이 비어 있으니 ‘집에 가면 뭐하노, 아들네나 가볼까’ 하는 마음이 들어요.(웃음)
그래도 안병욱(1920~2013) 같은 좋은 친구가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구십 넘은 친구들이 다 가고 나니
집이 아니라 세상이 빈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이 들어 혼자 된 제자들에게 가급적 재혼하라고 해요.
그런데 나이 차가 많은 건 남자들이 바라는 바이지만(웃음), 여러 가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친구 같은 반려자가 좋아요.
남편이 먼저 떠나면 오래 남아 있을 부인도 배려해야지요.

선생님은 재혼 생각 없으세요?(웃음)

99세면 조금 늦은 거 아니에요?(웃음) 나이 들수록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게 행복이에요.
자식들과 함께 살지 않더라도 자주 만나고, 친구도 만나고, 후배도 만나고 그러는 게 좋아요.
그런데 나이 들수록 감정조절을 잘해야 해요. 자식과 싸운다거나 심지어 손주들하고 싸우는 건(웃음) 감정조절이 안 돼서 그런 거예요.
저는 노인이 상을 받으며 감격해 눈물을 흘리면 속으로 ‘저 어른 오래 못 사시겠구나’(웃음) 그래요.
나쁜 건 아니지만 감정조절이 안 된다는 표시예요.

선생님은 유머가 풍부하신데, 유머관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시죠.

유머는 여유가 있어야 가능해요. 품격 있는 유머를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의 교양이나 인격이 높다는 징표이지요.
상대적으로 격이 낮은 유머는 그 사람의 격을 떨어뜨림은 물론 상대를 불쾌하게 만듭니다.
키신저가 당시 나카소네 수상과 미일 무역 불균형이 초미의 관심사일 때 일본을 방문해서 자기 부인을 이렇게 소개했답니다.
“미국인 중에서 일본을 가장 좋아하는 여성과 함께 왔습니다. 이분은 일본 제품 아니면 물건을 사지를 않습니다.”(웃음)
우리 사회에도 상대를 배려한 품격 있는 유머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부부간에는 물론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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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축복, 여성의 아름다운 감정 키워줘야

결혼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결혼은 축복이에요. 개인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부부간 사랑을 모르고 한평생을 산다는 건 행복한 일이 아니죠.
얼마 전 50대 후반 미혼 여성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때 슬그머니 물어봤어요. “부모님 사이가 좋지 않았느냐”고요.
그랬더니 “그걸 어떻게 아세요?” 하는 거예요. 폭력성이 있는 아버지를 둔 딸은 잠재적으로 남성에 대한 공포심이 있어요.
이런 경우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는 거지요. 제 주위에도 미혼 남성 교수가 몇 있는데,
그중 한 분은 위로 누나가 여섯이고 막내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출근하면 어머니하고 여성 7명 속에서 살다 보니 집에 있기도 싫고 여성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쉽게 결혼하지요. 또 이런 사람은 결혼하면 행복하게 살아요.
여자대학의 교수님 한 분이 학생들만 만나면 “남자들은 다 늑대라고 생각하라”고 해요. 자신의 선입견을 주입시키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나도 늑대처럼 보여요?” 하고 물었어요.(웃음) 건전한 교제를 통해 여성은 남성을 알아야 해요.
그런 면에서는 남녀공학이 좋다고 봐요. 한 제자가 결혼한다고 인사를 왔는데 상대가 바뀌었더라고요. 슬그머니 물으니
“막상 결혼을 하려니 얼굴보다는 성격이나 가치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되었대요. 그래서 제가 “아주 잘했다” 그랬지요.
그 제자가 “결혼생활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묻기에 “여성의 가장 큰 보배는 아름다운 감정이다. 아름다운 감정을 키워라.
너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지 말고, 조각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을 아름답게 키우라”고 했죠.

그런데 요즘 보면 결혼을 안 하고도 결혼한 것보다 더 보람 있게 사는 사람도 있어요. 내가 일찍 결혼하기를 잘했지,
지금 같았으면 결혼했을까 싶네요.(웃음) 지금은 결혼이 필수 과목이 아니라 선택 과목처럼 된 것 같아 걱정이에요.
 

“바가지도 아름다운 감정으로 긁으면 들을만 해요”

가정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시죠.

결혼과 연장선상에서 우선 남녀 차이를 서로 알아야 해요.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힘자랑을 하고요.
여자는 철들기 전부터 “나 예뻐?” 하고 물어요.
칠십 먹은 할머니들도 오랜만에 만나서 “언니!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예뻐졌다” 그러면 “진짜?” 하며 활짝 웃어요.(웃음)

일단 가정을 꾸리면 중요한 원칙이 있어요. ‘사랑이 있는 가정’ ‘사회에 봉사하는 가정’ 이 두 조건을 만족시켜야 해요.
제가 중학교에 입학하니 아버지께서 “이제부터 긴 인생을 살아갈 텐데, 나와 내 가족 걱정만 하면 네가 그만큼밖에 크지 못한다.
직장에서 동료들과 협력해 살면 그만큼 네가 더 커진다. 그런데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면 네가 민족 지도자만큼 커진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그런 마음을 자식들에게 줄 수 있어 행복한 가정이 된다면 결혼 안 한 게 후회될걸요.(웃음)
자식들이 사회에 나가서 많이 봉사하는 것만한 효도가 없어요. 성공했다는 건 사회에 많이 봉사했다는 거거든요.
고생을 많이 하신 어머니께서 밖에서 들려오는 내 얘기가 좋게 들리셨던지 “큰아들이 있어 행복하다. 자랑스럽다” 그러세요.

살다 보면 부부싸움도 피할 수 없는데, 부부싸움 어떻게 해야 할까요?(웃음)

교수들끼리 저녁식사를 마치고 식사 값을 누구한테 뒤집어씌울까 상의한 끝에
얼굴에 가장 기름기 도는 사람에게 씌우자는 결론이 났어요. 그런데 보니 세브란스 모 교수 얼굴이 제일 빛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식사 값은 당신이 내야겠다 했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내 얼굴이 그렇게 좋아 보여요?
사실은 제가 마닐라에 한 달 동안 국제회의 다녀오느라 그동안 마누라 잔소리 안 들으니 살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얼굴에 기름기가 돌았나?” 하는 거예요.(웃음) 아내가 나이 들면 잔소리하게 마련이지요.
바가지도 아름다운 감정을 갖고 긁으면 들을 만해요.(웃음) 그래서 저는 제자들한테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예술적으로 하라”고 해요.
또 하나 아이들이 어릴 때 면전에서 싸우면 애들이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몰래 해야 돼요.
아이들이 큰 다음에는 예술적인 부부싸움이 어떤 것인가 좀 보여주는 것도 좋아요.(웃음)
우리 부모님은 평생 부부싸움 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나는 신혼에 다투니 결혼을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실망감을 갖지 않도록
예방주사를 놓아줄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에요. 지인 중에 배 모 교수는 눈만 뜨면 잘 때까지 티격태격한대요. 나이 들어 밤낮으로
다투면 어쩌느냐고 하자, 그분 말씀이 “당신 철학교수 맞아? 이 나이 되면 싸우는 재미로 사는 거야” 하더군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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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독립심 키우는 게 중요

자녀는 어떻게 키우는 게 좋을까요?

제 연배 철학과 교수들은 애들을 다 여섯씩 두었는데, 제자 교수들은 하나 아니면 둘이에요. 자기들끼리 쑤군대며 어떻게
여섯씩 낳아 키우느냐고 흉을 봐요. 그러나 아이는 가능한 한 많이 낳을수록 좋은 거예요. 나무도 한두 그루 있으면 비바람에 쓰러져도,
숲으로 키우면 잘 자라거든요. 자기들끼리 부대끼며 의견을 조율하면서 성장하는 거예요. 아이들을 언제 독립시키느냐가 중요해요.
미국의 경우에는 일찌감치 각방에서 재우고 또 독립시키는데. 우리나라는 너무 늦게까지 끼고 있어 문제예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외손녀가 하나 있었는데 아무리 보고 싶어도 두 시간만 데리고 놀다가 보냈대요.
“저녁때인데 식사라도 함께 하고 보내시지요” 하면, 아이들은 조부모가 너무 오래 데리고 있으면 유약해져서 안 된다고 그랬대요.
내 외손주가 텍사스에 사는데 초등학교 5학년짜리 옆집 아이가 잔디 깎는 일을 시켜달라고 해서 왜 그러느냐고 묻자,
카메라를 사려는데 용돈만으로는 모자라서 그런다는 거예요. 일을 시키니 땀을 뻘뻘 흘리며 깨끗하게 잔디를 깎더래요.
내 손주가 “내가 이래 봬도 록펠러 손주보다 부자예요” 그러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묻자, “록펠러 손주도 한 달 용돈이 저와 같던데,
그 애는 거기서 십일조를 교회에 헌금하니까 자기가 10% 더 많다”고 하더군요.(웃음) 아무리 부유해도 아이들은 이렇게 키워야 해요.
어려서부터 독립심을 키우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데 자식은 너무 일찍 독립시키면 정이 없고요, 또 너무 오래 데리고 있다 보면 불편하죠. 저는 아들이 둘인데, 둘 다 2년씩 같이 살고 내보냈어요. 며느리들도 ‘2년만 참자’ 하는 용기가 생기잖아요.(웃음)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여성조선> 독자들을 위해 자유로운 토크쇼 한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기회를 만들어보죠. <여성조선> 독자 여러분, 아름다운 감정을 갖도록 노력하세요. 감사합니다.
 
김형석 교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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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났다. 일본 조치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및 명예교수, 미국 시카고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의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 철학계 1세대 교육자’로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한국 철학계의 거두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도 방송, 강연, 집필 등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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