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만상

落 花 - 이형기

여풍2 2018. 4. 26. 09:22

                                        

                      


    落 花         

                 - 이형기 -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시인 (李炯基 1933~2005)



이형기 시인은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16세 때인 진주농림 5학년이던 1949년,

촉석루예술제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면서부터 시인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 2등인 차상에 오른 이가 바로 박재삼 시인.

이런 연유로 평생 가까운 친구가 된 동갑내기 시인 박재삼이다.

“이름 한번 불러보자

아아 박재삼!

이왕 갔으니

내 자리도 네 가까이 하나 봐다오”


박재삼 시인의 사망에 애도하며 추모시를 읊었던....


이형기 시인은 이어 이듬해

<비오는 날>(1949), <코스모스>(1950), <강가에서>(1950)로

잡지〈문예>를 통해 서정주의 추천으로 정식 등단한다.


만 17살의, 최연소 등단기록을 세운 시인이다.


“고독과 고통은 시인의 양식”이라고 하던 시인은

11년이란 긴 세월을 뇌졸중으로 투병하면서도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부인의 도움을 받아 구술 시작(詩作)을 했을 정도로

시혼(詩魂)을 불사르다 사망한 시인이다. 향년 72세였다.


투병 중에 쓴 시와 잠언을 모아서 낸 시집이

바로〈절벽〉으로 그 동명의 시다.


         절벽 - 이형기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
높게
날카롭게
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것

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
몸을 던질 밖에 다른 길이 없는
냉혹함으로
거기 그렇게 고립해 있고나
아아 절벽

 


아아 절벽! 이라니...


가로막힌 한 생!


죽음을 맞닥뜨린

한 영혼의 처절한 절규가 아닐까!




그의 시의 세계를 논하면,

그 어린 17세에 [문예]지에 추천된 이 시인의 조숙성(早熟性)은

자랑의 대상도, 비난의 대상도 될 수 없는 그의 운명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이며 사회학적 미학의 정점을 보여준 시인이다.

초기에는 삶과 인생을 긍정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미적 감각의 서정시를 쓰고

후기에는 허무주의를 바탕으로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감각과 격정을 산문시적인 가락으로 표현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나서 최고의 일이 시 쓰는 일이지…”


이처럼 시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유달리 강했던 시인 이형기,

후기 시들이 우리나라 본격비평에 의해 평가를 받고 있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작품은

바로 20대 초기에 쓴 서정시로 그의 대표시 <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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