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만상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중 제4곡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여풍2 2017. 11. 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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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니니가 지휘한 레스피기 음반들을 대단히 좋아하는데, 흔히들 로마 3부작이라 일컫는

<로마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축제>를 토스카니니의 고색창연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듣노라면(옛 음원이라 소리는 다소 거칠지만) 그 현란한 색채감에 실로 커다란 희열과 카타르시스가 있다.


여름날의 신선한 이른 아침에 한가로운 여행자로서 로마의 텅 빈 옛 돌길을 새소리를 들으며 산책하는 듯한

3곡도 물론 좋았지만, 아침 안개 속으로 로마의 대동맥 아피아 가도를 행진하는 고대 로마 군대의

장엄한 개선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제4<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로마 3부작은 레스피기가 로마의 풍물을 통해 조국의 옛 영광을 환기시키려는 의도로 작곡되었다고 하는데,

곡의 색채감이 뛰어난 이유는 레스피기가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서 관현악법을 배웠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쓴 그 다채롭고 화려한 교향 모음곡 <세헤라자데>를 생각해 보라...


아피아 가도는 고대 로마의 도로 중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길인데 기원전 312년에서 기원전 244년에 걸쳐

군사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며, 로마에서 이탈리아 반도 남동부의 브린디시까지 이어지는

장장 563킬로미터의 엄청난 길이를 자랑한다.

레스피기는 고대 로마 군대가 어디에선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로 입성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이 곡을 썼다는데, 전반부는 보일 듯 말 듯 멀리서 행진하는 모습을 묘사하느라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소리가 간간이 스칠 뿐이며, 후반부에 접어들면 점점 가까이 다가오다 바로 눈앞을 지나가는

개선군의 화려한 행렬을 그야말로 웅장하고 박진감 있게 그리고 있다.

전반부에서 약 3분 정도나 소리가 시원하게 들리지 않아 처음 감상할 때는 좀 지루하고 짜증도 나지만

그게 후반부의 거대한 음향효과를 배가하기 위한 의도임을 알고 나면 전반부의 무료함을 그 어떤 기대감 속에서

충분히 견딜 수 있게 된다.


아피아 가도의 종착점인 브린디시는 내가 199210월말 이곳에서 아드리아틱이라는 엄청 큰 여객선을 타고

무려 18시간에 걸쳐 이오니아 해를 건너 그리스 페트라 항까지 갈 때, 그리고 아테네에서 다시 이태리로

돌아올 때, 비록 한나절씩이었지만 두 번 발을 디딘 곳인데 하루 한 편밖에 없는 배를 기다리며 시간을 죽이느라

이리저리 걸어 다닌 기억이 있다.

늙은 어미와 첫눈에 사이코임을 알 수 있는 딸, 그 두 사람이 운영하는 초라한 식당에서 딸의 흥겨운 콧노래를

들으며 먹었던 스파게티와 맥주 한잔, 식사 후 걸었던 부두 근처의 달동네 골목길들(북한산 기슭 옛 정릉4동의

달동네를 연상시키던... 지구의 이편저편 할 것 없이 달동네의 친근하고 구수한 모습은 어디나 똑같다고

느꼈던,,,), 그리고 깊은 밤에 앉아 있었던 이를 모를 공원...

브린디시가 지리적 관계로 예로부터 그리스와 이탈리아 간의 교역중심지였으며 로마제국 원정군이 들락거리고

십자군의 출발지라는 등 많은 사연을 지닌 곳이라는 건 여행책자를 통해 대충 알고 있었으나,

돈 아낀다고 계속 밤기차로 다니느라 여독에 지친 데다 브린디시에 오기 며칠 전 파리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후유증 등으로 괜히 피곤한 마음에 부두 인근만 걷다가 대충 보고 떠났던 것 같은데,

당시에도 브린디시가 상당한 연륜이 느껴지는 마을이었던 것 같긴 했다.


아피아 가도고 브린디시고 간에, 세월은 흘러 인간은 속절없이 떠나가고 이들 장소는 지나간 인간들의 흔적을

포용한 채 변함없이 영속함에 숙연한 기분이 든다...

애인을 두고 십자군 원정에 따라나선 청년도,

새끼를 집에 두고 로마제국 군인으로 무슨 큰일을 하러 가는 양 자랑스레 이오니아 해를 건넜던 병사도,

전쟁터로 다가가는 고대 목선 갑판 위에서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며 눈물짓던 장군도,

그리스로 원정을 떠난 단골손님 병졸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던 브린디시의 매춘녀도,

밥 당번이라 창을 한번 휘둘러보지도 않았는데 동료들 덕분에 개선군이 되어 브린디시를 거쳐 로마를 향해

아피아 가도를 씩씩하게 걷던 노병도 지금은 다 떠나갔다...

런던 태생이나 그리스에 미쳐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까지 했고 분방한 애정행각 등 야단스러운 삶을 살았던

시인 바이런도 어느 순간 인생살이의 소란함과 분주함이 부질없다고 느껴졌는지 아테네 인근의 수니온 절벽을

찾아선 조용히 살다 갈 테니 이젠 자신을 가만 놓아두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수니온 대리석 절벽 위에 나를 놓아두오.

그곳에는 파도와 나 이외엔 아무도 없다네.

우리의 속삭임 귓전에 흩날리는 그곳에서

백조처럼 노래하다 죽을 수 있게

그냥 나를 내버려두오...

 

바닷가 절벽 위에 우뚝 선 포세이돈 신전을 구경한다고 나도 수니온에 가보았는데,

포세이돈 신전의 실루엣과 함께 내려다보는 에게 해의 포도주 빛 일몰은 심각할 정도로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바이런의 노래 그대로였다...


석양의 포세이돈 신전. 수니온 절벽, 그리스.

싸구려 카메라로 찍어 엉성한 사진이지만...

 

 

그 옛날, 지도자의 헛된 욕심에 의해 튼튼하지도 않은 신발을 신고 아피아 가도의 돌길을 고단하게 걸어야 했던

고대 로마제국의 병졸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드린다...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중 제4곡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카라얀 지휘로...

본문에 적었듯 전반부 3분 정도는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희미하므로 지루해도 인내 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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