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만상

[매경이 만난 사람] 원로 삼성맨 윤종용의 고언

여풍2 2017. 9. 27. 14:27

[매경이 만난 사람] 원로 삼성맨 윤종용의 고언

"대기업 없이 국가경젱 끌고가겠다는 발상은 이해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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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최고경영자(CEO)로서 18년, 삼성맨으로 42년을 살았던 그의 사무실은 여전히 현장이었다.
가득 메운 책들과 책상 위에 층층이 쌓아 올려둔 서류들은 그의 방문 옆에 걸어놓은 좌우명 그대로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에 이른다.
7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견고하고 거침없었다.

지난 25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난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우리 사회에서 갈수록 커지는 반기업정서와 각종 오해에 대해 안타까움이 많았다.
윤 전 부회장은 "지난 30년 동안 한국에선 경제 양극화, 정경유착 같은
경제 발전의 후유증을 '재벌원죄론'으로 내몰아 선거철만 되면 기업에게 책임을 돌리며
기업 때리기와 규제의 칼날 갖다 대기를 반복했다"며
"그로 인해 반기업정서가 확산되고 사회문제의 많은 부분이
기업 책임으로 보이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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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별로 기여하지도 못한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월급 한 푼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반세기 넘게 힘겹게 키운 기업을 우습게 알고 무시하는 것 아닌가 싶다"며 안타까워했다.
"돈을 벌어보지 못한 사람은 쉽게 돈을 쓰지만,
돈을 직접 벌어본 사람은 무서워서 제대로 쓰지도 못한다"고 덧붙였다.
윤 전 부회장은 "지금 이 나라가 어떻게 만든 나라인가.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지난 50~60년 동안 피땀 흘리며
만들어 물려준 나라"라면서 "삼성전자는 그냥 만들어진 회사가 아니다.
현대차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자산이며 자존심"이라고 덧붙였다.

조금만 밀어주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기업들은 아직 저력이 남아 있다.
제조업이 경쟁력을 갖도록 규제를 과감히 풀고 지원한다면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제조업"이라며
"그래서 미국 독일 일본 중국마저 '제조업 부활' 정책, 해외 진출 기업의 '국내 U턴' 정책 등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췄다던 조선이 무너졌고,
해운이 휩쓸려나갔고, 최근에는 자동차까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러다간 한국 주축 제조업이 모두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크다.

▷20~30년 전부터 예측이 가능했던 일이 현실화됐을 뿐 놀랄 일은 아니다.
산업사를 꿰뚫어보는 역사인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예측할 수 있던 일이었다.
바로 15년 전인 2002년 9월, 스웨덴의 3대 항구이며 조선도시인 말뫼의 현지 언론이
'말뫼가 울었다'고 대서특필했다.
말뫼에 있는 코쿰스(Kockums) 조선소의 1500t 골리앗크레인이
현대중공업으로 단돈 1달러에 팔려 울산으로 떠나던 날이었다.

1996년 삼성이 자동차산업 진출을 검토할 당시
시찰단 일원으로 미국 자동차산업의 메카인 디트로이트를 방문한 적이 있다.
100여 년 동안 세계 자동차산업의 메카였던 도시가 너무도 황폐화돼 가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진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30년도 안 되는 사이에 현실로 다가왔다.
그들이 직면했던 문제를 만약 기업과 정부가 과거를 살피고 미래를 예측해 사전에 충분히 대비했다면
이런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전 세계 경제가 완연한 회복세를 타고 있는데, 한국 기업들은 그렇지 못하다.

▷기업인들의 자신감과 의욕 상실이 가장 큰 원인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30년 동안 정치권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업 때리기와 규제의 칼을 갖다 대면서
경제적 문제는 기업, 특히 대기업 책임으로 돌리며 반기업정서를 부추겨 왔다.
이에 따라 반기업적 활동은 더욱 노골화됐고 기업 활동은 더욱 위축됐다.
1960~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세계에서 기업가정신이 가장 충만한 나라라고 피터 드러커가 말했다.
그러나 지금의 기업에서는 그때의 역동성과 활력은 찾아볼 수 없다. 기업가정신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최저임금 인상, 통상임금 조정, 법인세 인상과 같은 경제에 악재가 되는 정책만 계속 쏟아낸다면
기업들이 더욱 어려워질 것은 뻔한 일이다.

―기업가정신이 살아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불확실하고 규제는 계속 강화되며,
최근에는 기업이 해체될 정도의 위협감까지 느끼는 경영 환경에서
어떻게 투자를 확대하고 기업을 키울 수 있겠는가.
이러한 환경에서 사업의 의욕은 사라지고, 도전보다는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 보니
기업가정신이 상실될 수밖에 없다.
기업가정신이란 투철한 혁신의 의지와 강한 호기심, 열정을 갖고
끊임없이 도전해 성취해 내는 것을 말한다.
규제를 풀어 자유롭게 경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간섭하지 않고 지원해준다면
기업은 스스로 혁신하고 성장할 수 있다.

―오히려 최근 재계에서는 '대기업 배싱(bashing)' 얘기가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다.

▷우리나라 4대 그룹이 창출하는 부가가치를 합치면 국내총생산(GDP)의 10%에 육박한다.
정치인들은 지금의 기업들을 키워내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됐는지 모를 것이다.
경영 일선에서의 오랜 경험에 비춰보면 건실한 중견기업을 하나 키우는 데 최소 20~30년은 걸린다.
우리나라 대표 기업들은 대개 1950~1960년대에 설립돼
반세기를 넘게 정성 들여 키운 소중한 자산이다.
이러한 기업들이 왜 정치인들의 '때리기'와 적폐 대상이 돼야 하고,
대기업은 배싱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대기업 없이 국가 경제를 끌고 가겠다는 발상이 너무 천진난만하다.

―한국 대기업들, 소위 재벌이라고 하면 정경유착을 통해 특혜를 받고 성장했다는 인식이 강하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 사상이 남아 있다.
공상(工商)을 하는 기업인들은 돈만 벌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하층 계급이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표현은 하지 않지만 많은 것 같다.
삼성에 대해선 욕하면서 아들딸을 삼성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는 것처럼.
기업인, 특히 재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정경을 유착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과거에 우리한테는 자본도, 기술도, 시장도 없었으니
정부가 외국에서 들여온 돈을 기업에 저리로 빌려주면서 공장을 세우게 했다.
이걸 정경유착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중에도 많은 기업이 도태되고, 살아남은 기업은 국민 경제에 크게 기여했다.
이런 현상은 100여 년 전 산업화 초기의 미국, 유럽, 일본에서도 있었다.
그런데도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정경유착은 정치권과 기업 어느 쪽의 책임이 더 많은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기업이 정치권보다 약자이며 을(乙)이다 보니
갑(甲)인 정치권의 요구에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

―정경유착은 정부의 규제와 맞물려 있는 측면도 있다.

▷관료주의적 구시대 사고방식으로 기업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기 위해 규제하려 하는 것 같다.
규제는 부조리와 부정의 시발점이며 온상이 된다.
규제가 강할수록 부정의 로비 가능성은 커지고,
공무원들의 부정 수단은 많아지며, 기업은 규제의 덫에서 더욱 헤맬 것이다.
규제는 국민의 건강이나 환경보호, 국방이나 외교, 국민의 안전처럼
치명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풀어야 한다.
불공정 거래나 불법적 행위는 법률에 의해 관리해도 충분하다.

―새 정부의 제1 과제는 좋은 일자리 창출이다.

▷좋은 일자리 창출은 정부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부가 직접 좋은 일자리를 만들 수 없다.
정부는 기업이 좋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일자리는 경제성장으로 만들어진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소득주도 성장으로 임시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장기적 해결 방안은 아니다.
증가하는 비용을 감당할 곳은 기업과 정부의 '곳간'뿐이기 때문이다.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없는 곳에 인위적으로 일자리를 만든다고
그것이 좋은 일자리가 될 수는 없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공유경제 등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정부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정부는 이제 기업을 관리 감독하려 하지 말고 경제는 시장과 기업에 맡겨야 한다.
각종 규제를 과감히 철폐해 기업하기 좋은 환경과 인프라스트럭처, 시스템을 조성하고
고질적인 노동 문제와 각종 부조리를 철저히 개혁 해주기를 바란다.
국가나 기업을 망하게 하는 망국(亡國)의 바이러스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 있다.
정부는 기업의 관리감독자가 아니라 동행(同行)자이며 협력자가 되어주길 바란다.

반도체 호황에 방심해선 안돼…잘나갈 때가 오히려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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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윤종용 전 부회장이 지난 25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본인의 좌우명이기도 한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환갑 선물로 이재용 부회장이 액자로 만들어서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 부회장과 함께 4년 동안 글로벌 경영현장을 함께 다녔다. [김재훈 기자]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그룹에 입사한 것은
1966년, 삼성전자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68년이다.
당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맞은편에 있었던 삼성 본관에서
이병철 선대 회장이 삼성전자 설립을 위한 팀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입사 2년차 신입사원인 그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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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황을 보면 삼성만 나 홀로 반도체 호황을 누리며 한국 경제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삼성의 저력이 뭔가.

▷외부에서 보기에 삼성은 아직도 관리 위주의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조직으로 보일지 모르나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그동안 삼성은 초일류가 되기 위해 인재 중시와 기술 중시 같은 점에 중점적으로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회사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공정한 인사와 교육, 선진적인 경영관리 시스템, 권한 이양,
깨끗하고 파벌 없는 조직문화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삼성 임직원들은 주인의식이 강하고 애사심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반도체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


▷반도체는 자전거와 비슷하다. 연구개발(R&D)과 투자를 쉼없이 해야 한다.
타이밍 사업이다. 외환위기 등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꾸준히 투자를 해왔던 이유다.
삼성전자 임직원들에게는 그게 몸에 배어 있다. 위기의식도 그래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이 위기인가.

▷세상만사가 그렇지만 특히 기업 경영에 있어서는 잘될 때가 가장 위기다.
잘될 때는 자만에 빠지고 현실에 안주해 미래에 대비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위기는 우리 주변에 항상 도사리고 있다가 예고 없이 찾아오고 기업은 하루아침에 부서진다.
지금이 제일 걱정이다.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지휘부의 부재로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이 부회장이 정치적 오해로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도 마음이 아프다. 삼
성 임직원들은 이 위기 속에서도 반도체 호황으로 실적이 좋은 것에 방심해서는 안 된다.
세계 시장을 상대로 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이런 때일수록 임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일치단결해 이 위기를 현명하게 이겨내야 한다.
삼성 임직원들이라면 이러한 위기의식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잘 대처하리라고 믿는다.
삼성은 이보다 더 큰 위기에도 임직원들이 똘똘 뭉쳐 여러 번 극복해왔다.

―사상 초유의 총수 부재 사태를 겪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가까운 시일 내에 조직을 추스르는 인사도 하고, 그룹을 전자·금융·기타 그룹으로 나누어
주축회사를 중심으로 경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룹 회사들은 반드시 협업하는 조직 체제로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일본도 2차 세계대전 직후 각 그룹이 해체되자
큰 회사 사장들을 중심으로 모여서 논의하는 장을 마련해 경영했다.
삼성도 주요 계열사 사장단 협의체를 만들어야
사회적 기여 등을 어떻게 할지도 논의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삼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병철 선대 회장이 여러 번 정치적 문제로 위기를 겪은 후부터는 정치와는 '불가근 불가원'을 지켰다.
과거에는 그랬을 수 있지만 지금의 삼성은 아니다.
삼성전자는 한국 기업으로는 가장 먼저 국제회계기준(IFRS)을 도입했고,
전산화와 전사적 자원관리(ERP) 같은 경영관리 시스템을 가장 잘 갖춘 기업이다.
회계나 세무관리도 일류기업이다. 뒷돈 자체를 만들 수 없게 만들어놨다.
내가 CEO로서 봐왔던 것들이다.

―후배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전자·전기 업체 중 세계 1위인 삼성전자는 한국이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자랑스러운 회사다.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당신 회사가 아니라 국민의 회사이며, 국가 자산이다.
어떻게 세우고 만든 글로벌 1위 회사인가.
삼성 임직원들은 이 자존심을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윤종용 前 삼성전자 부회장은…

△1944년 경북 영천 출생 △1966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1966년 삼성그룹 입사 △1977년 삼성전자공업 도쿄지점장 △1980년 삼성전자공업 TV사업부장
△1985년 삼성전자 종합연구소장 △1990년 삼성전자 가전부문 대표 △1992년 삼성전자 가전부문 사장
△1992년 삼성전기 사장 △1994년 삼성전관 사장 △1995년 삼성그룹 일본 본사 사장
△1997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 △2000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2008년 삼성전자 상임고문
△2011~2015년 국가지식재산위원회 위원장 △현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이사장, 한국공학교육인증원 이사장

[대담 = 김정욱 산업부장 / 정리 = 송성훈 기자 / 사진 = 김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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