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방황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여풍2 2017. 8. 17. 14:53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Anton Schnack..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初秋의 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처량한 가을 비가 내리고, 그리운 이의

발길이 끊어진 뒤 한 주일이 가깝도록 홀로 있을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벽이 헐어 흙덩이가 떨어지고

삭은 문설주 위에 아이세여 너를 사랑했노라 라는

판독조차 어려운 글귀를 읽을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소행이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가져다 주었는지”…..

라고 쓰인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발견했을 때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무심코 한 거짓말, 아니면 치기 어린 장난이었을까?

지금은 그 많은 소행을 기억에서 찾을 수도 없는데

그러나, 아버지는 그 때문에 속을 태우셨던 것이니.

 

동물원에 갇혀 불안하고 초조하게 서성대는 호랑이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끊임 없이 철책 가를 맴도는 그 광채 나는 눈과 무서운 분노,

괴로움을 못 이긴 포효와 앞 발에 서린 절망.

그리고, 미친 듯 반복되는 철창 내 순환,

이 모든 것이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횔더린의 시와 아이헨도르프의 가곡.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시절의 동무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이미 우러러 볼 고관대작이나 돈 많은 기업가가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나 조종하는 한낱 시인에 지나지 않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긴 하나

우리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태도로 나올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망울.

그리고 재스민의 향기.

이 향은 창 앞에 한 그루의 노목이 서있던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음악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 밤에,

누군가 모래자갈을 조심스레 밟고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한 순간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이는데,

그러나 당신은 이미 열흘 가까이 침울한 병실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들 무렵

불을 밝힌 차창이 유령처럼 요란하게 지나가고,

어여쁜 여인이 창가에 앉아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을 때.

 

찬란하고도 화려했던 가면무도회에서 귀가했을 때,

어느 대의원의 강연 집을 읽고 있을 때,

상큼한 아침공기가 소리 없이 기랑 비를 희롱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다가 문득 열다섯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가

여기 잠들다라고 적힌 비문을 읽을 때, 아아 그는 어릴 때 절친했던 동무.

변화 없는 도회의 집과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는 시커먼 냇물,

많은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과 수학교과서,

세월이 흘러도 사랑하는 이로부터 편지 한 장 오지 않을 때,

그 녀는 병원에 있을까, 혹시 그녀가 띄운 편지가 다른 남자에게 배달 돼

애정과 동경으로 가득한 사연이 웃음거리로 읽히지나 않을지?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버린 걸까?

그도 아니면 이런 봄날 어느 다른 남자와 산책을 즐기는 거나 아닐까?

 

처음 간 낯선 어느 시골주막에서 지낸 외로운 하루 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옆 방 문이 열린 후 속삭이는 음성이 들려오고,

오래된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칠 때,

그 때 당신은 불현듯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

 

창공 높이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끝난 텅 빈 들판.

긴 세월 지난 후 어릴 때 살았던 작은 고향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엔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뛰놀던 자리에는

붉은 주택들이 들어섰으며,

당신이 한 시절 살았던 집엔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고,

왕자처럼 늠름했던 아카시아 숲도 모두 베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어찌 이들뿐이랴.

오뉴월의 장의행렬과 가난에 찌든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 색과 검정색과 회색 빛깔들,

둔탁하게 울리는 종소리, 바이올린의 G, 가을 밭에 피어 오르는 연기,

자동차를 탄 출세한 여인의 좁은 어깨, 유랑가극단의 여배우들,

줄에서 세 번이나 떨어진 광대, 지붕을 때리는 비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보름 밤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의 두세 구절, 굶주린 아이들의 모습,

철창에 갇힌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에 쌓이는 눈송이,

이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追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Was traurig macht)

1953년부터 1981년까지 고등하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독일의 산문작가 안톤 슈낙의 산문수필이다.

미래를 향한 꿈에서 해방된 노인은

추억을 되새김질 하며 산다고 했다.

우연히 아득한 옛 날을 회상하다

60년 전에 외웠던 안톤 슈낙의 이 글이 생각났다.

안톤 슈낙은 모국 독일에서는

무명작가에 가까울 정도로 그 이름이 미미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하나로

세계적인 작가로 알려졌다.

우리세대는 독문학자 김진섭교수의 번역본으로

배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암송할 정도로

감동과 감흥을 주었던

누구나 몰입했던 작품이다.[받은메일]

 


Chopin 'Raindrop Pre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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