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만상

[스크랩] [시해설] 유치환 : 깃발

여풍2 2013. 6. 5. 22:39

 

                       [시해설] 유치환 : 깃발

 작 성 자  김원호 

유치환 :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집필 의도 및 감상
기(旗)는 흔히 ‘국가’를 표상한다. 그러나 이 시의 깃발은 특정 국가의 국기(國旗)가 아니라 관념상의 ‘국가’라는 개념을 표상할 뿐이다.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이상을 추구하고 이상국(理想國)의 실현을 동경해 왔다. 그러나 지구상의 국가들은 많은 문제점을 간직한 채 존재할 뿐 아직 염원하는 이상은 실현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유치환은 이 시에서 근본적으로 국가의 개념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있다. 이것은 독일의 철학가 니체의 허무주의 영향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1920, 30년대에 유행하던 아나키즘(anarchism ; 무정부주의)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인간은 자기 한계를 초탈하여 이상에 도달할 수 없음에도 여전히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 허무적이고 비극적인 의지를 그림으로써 유치환은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철학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기본 이해 항목
주제 : 영원과 이상에 대한 동경과 좌절.
갈래 : 상징시, 관념시.
성격 : 상징적, 의지적, 허무적, 역동적.
배경 사상 :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어조 : 남성적 어조.
심상 제시 방법 : 비유적 심상.
영향 관계 : 독일의 철학가 니체의 허무주의 영향.
단락 구성 :
    제1단락(제1~3행) ㅡ 힘차게 펄럭이는 깃발의 역동적 모습.
    제2단락(제4~6행) ㅡ 깃발의 순수한 열정과 애수.
    제3단락(제7~9행) ㅡ 영원과 이상에의 비극적 의지.
출전 : <조선문단> (1936. 1.)


시어 및 구절 풀이
깃발 ㅡ 깃발은 깃대에 매달려 높은 공중에서 휘날린다. 이것은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염원을 나타내지만, 깃대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여기에 깃발이 지닌 모순적 역설이 성립된다. 이 시에는 ‘깃발’을 은유로 나타낸 보조관념이 5개 있다. ‘아우성·손수건·순정’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애수·마음’은 이상향에 도달하지 못하는 감상적 심정을 상징한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ㅡ 1) 시각인 ‘깃발’을 청각인 ‘아우성’으로 전이(轉移)시킨 ‘공감각적 심상’의 표현.  2) ‘소리 없는 아우성’은 모순 형용으로 된 역설(逆說)의 표현.  3) ‘아우성’은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하던 많은 사람들의 부르짖음 소리가 깃발에 들어 있다는 것.
저 푸른 해원 ㅡ ‘푸른’은 이상과 동경을 상징한다. ‘해원(海原)’은 바다를 뜻하는 일본어식 표현이다. 따라서 ‘푸른 해원’은 ‘이상 세계·동경의 세계’를 뜻한다.
영원한 ㅡ 희구하는 ‘이상’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노스탤지어(nostalgia) ㅡ 1)우리말로 ‘향수(鄕愁)’에 해당하는 뜻으로, 외래어인 ‘노스탤지어’를 시어로 사용한 것은 동음이의어인 ‘향수(香水)’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2) ‘향수(鄕愁)’는 과거 지향적인 성격이 있지만, ‘노스탤지어’는 미래 지향적인 ‘동경(憧憬)’의 의미도 갖고 있어 이상(理想)을 동경하는 자세를 표현하기에 어울린다고 하겠다.
손수건 ㅡ ‘손수건’은 ‘깃발’과 외형상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손수건’은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는 역동감의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쓰인 것이다. 그러나 ‘손수건’을 ‘이별’의 의미로 해석하면 이 시의 방향을 잘못 이끌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헌다.
순정 ㅡ 1) 순수한 그리움.  2) ‘노스탤지어’에서 유발(誘發)되어 나온 시어이다.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ㅡ 1)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  2) 이 구절은 원관념을 이중의 비유로 형상화하고 있다. 즉 비유에 있어 대부분의 원관념은 추상적·관념적인 데 비해, 보조관념은 구체적·형상적인 사물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 점이 반대로 되어 있으니, 원관념인 ‘깃발’이 구체적·형상적 사물인 데 비해 보조관념인 ‘순정’은 추상적·관념적인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순정’을 ‘물결’이라는 보조관념을 사용하여 이중적 비유로 형상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이와 같은 구조의 비유로 된 구절은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가 있다.
오로지 ㅡ 자기의 의지가 변함없음을 나타낸다.
맑고 곧은 이념 ㅡ 모든 깃발은 어떤 이념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이념은 항상 순수하고 올바른 성격을 지니게 마련이다.
푯대 ㅡ 1) 깃대.  2) 모든 깃대는 항상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 있다. 이것은 이상에 대한 동경과 곧은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애수(哀愁) ㅡ 1) ‘애수(哀愁)’는 이 시의 정조(情調)를 대표한다.  2) 앞의 ‘순정’과 밑의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연결하는 매개적 역할을 한다.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ㅡ 1) 백색은 ‘현실’을 상징한다.  2) 대부분의 깃발(기)은 바탕 색이 흰색이다.  3) 이 구절은 이상을 염원하지만 실패하고 좌절할 것을 암시한다. 모든 새는 아침마다 하늘로 비상(飛翔)하지만 저녁이면 지상으로 되돌아온다. 새가 하늘 꼭대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새가 지상에 터잡고 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깃발이 깃대에서 펄럭이는 것은 이상을 향해 날아오르겠다는 의지를 표상한다. 그러나 그 깃발을 깃대에서 이탈(離脫)시켰을 때, 그것은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지상에 추락하게 마련이다.
아! ㅡ ‘한탄·탄식’을 나타내는 영탄법.
누구인가? ㅡ ‘이렇게 슬프고도 ~ 달 줄을 안 그는’과 도치된 표현.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 ㅡ 순수, 영원의 세계를 염원하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 의지를 뜻한다.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ㅡ 아득한 오랜 옛날, 그 어떤 사람이 깃대에 깃발을 달아매고 그것이 이념의 표상이요, 이상을 상징한다고 부르짖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발전하여 형성된 것이 ‘국가’란 개념이다. 그러나 역사상 ‘국가’는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대체로 몇몇 권력자가 백성들에게 고통만 주어 오게 됐다. 이래서 19세기 말엽에 나온 극단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이다. 아나키즘은 정치 권력이나 정부의 지배를 부정하고, 절대적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기 위해 정부 조직을 파괴하는 행동을 실천할 것을 부르짖는다. 주권을 상실하고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을 받는 시인은 근본적으로 국가라는 제도에 대해 회의를 느꼈을 것이다. 유치환이 무정부주의를 부르짖는 아나키스트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아시아권(圈)에서 유행하였던 아나키즘의 풍조가 이 시에 영향을 주어 반영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출처 : solbright
글쓴이 : kc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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