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지용(鄭芝溶)
정지용(鄭芝溶)은 “한국의 현대시가 지용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만큼,
1930년대 한국 현대시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902년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생. 1918년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 휘문고보에 재학 중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搖籃)≫을 발간하였으며, 1919년 3ㆍ1운동 당시에는 교내 시위를 주동하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1922년 휘문고보 졸업, 1923년 휘문고보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 입학.
1926년 유학생 잡지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는 특히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다듬은 절제된 표현을 사용했다.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을 받고 있는 ‘향수(鄕愁)’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카페·프란스]
옴겨다 심은 棕櫚[종려]나무 밑에
빗두루 슨 장명등,
카페·프란스에 가쟈.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압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 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늙이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쟈.
이 놈의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놈의 心臟[심장]은 벌레 먹은 薔薇[장미]
제비 처럼 젖은 놈이 뛰여 간다.
『오오 패롵(鸚鵡[앵무]) 서방! 꾿 이브닝!』
『꾿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鬱金香[울금향] 아가씨는 이밤에도
更紗[경사] 커 ― 틴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子爵[자작]의 아들도 아모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히여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大理石[대리석] 테이블에 닷는 내뺌이 슬프구나!
오오, 異國種[이국종]강아지야
내발을 빨어다오.
내발을 빨어다오.
정지용,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된 향수 (사진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휘문고보 영어과 교사로 부임했다.
1930년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등과 동인지 ≪시문학≫을 발간, 1933년 김기림 등과 9인회를 결성했다.
같은 해 ≪가톨릭청년≫ 편집고문이 되어 다수의 시와 산문을 발표했고, 시인 이상(李箱)의 시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1935년 첫 번째 시집 ≪정지용 시집≫을 출간했으며,
1939년부터는 ≪문장(文章)≫의 시 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을 소개했다.
1941년 두 번째 시집 ≪백록담≫을 발간했다.
해방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경향신문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과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그해에 시집 ≪지용시선≫을 발간했다. 1947년 서울대학교에서 시경(詩經)을 강의했다.
1948년이화여대 교수를 사임하고, 은거하며 문학독본을 출간했다.
1949년 2월 ≪산문(散文)≫출간.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했던 문인들과 함께
강제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
이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지용은 한국 현대시의 기틀을 마련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분단 이후 그의 시를 언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문인들의 청원으로 1988년 3월 해금되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어 박두진이 1회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995년 ‘향수’가 가요로 만들어져 발표되기도 했으며,
2003년 5월에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시집으로 ≪정지용 시집≫(시문학사, 1935), ≪백록담≫(문장사, 1941),
≪지용시선≫(을유문화사, 1946)이 있다.
(위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지용편과 1980년 깊은샘에서 출간한 <정지용 시와산문>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향수(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유리창(琉璃廠)]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아갔구나!